그를 딱 한 번 본 적 있다. 그것도 아주 잠깐 스치듯 봤다. 평생 부모 그늘에서 잘 살아 온 부잣집 도련님의 새하얀 얼굴은 무엇으로 만들어냈을까? 내가 알고 있는 그는 젊은 날엔 지게를 져 받은 품삯으로 밥을 해결한 적 있는 시인이다. 그래서 육순이 넘은 지금도 지게를 졌던 자리가 아픈 사람, 나무의 환상통을 대신 앓고 있는 사람이다. 고생을 아름다운 물방울로 승화시켜 제 얼굴을 빚은 양 그는 참으로 잘 늙어 보였다.
작년 계간지 봄호에 실린 많은 시인의 작품 중 단연 그의 시편들이 우수하다고 느꼈다. 읽고 또 읽었다. 학교에서는 학생들에게, 집에서는 가족에게, 또 내가 아는 많은 사람에게 숨이 가쁘게 읽어 주거나 외워 주며 흥분했다. 그때 읽은 시들이 시집 ‘도장골 시편’에 고스란히 들어 있었다. 그중 산골에 피어 열매를 맺는 찔레나무 열매를 노래할 때가 가장 눈부셨다. 제 열매를 아름답게 가꿔 새에게 먹히기를 기다리는 찔레나무 열매인 영실(營實), 영실에게 새의 날개는 유목의 천막이며 새의 깃털들은 꿈의 들것이다. 남의 눈에는 영어(囹圄) 같겠으나 누군가의 배고픔 속에 깃드는 일은 따뜻한 포복이며 누군가의 배고픔을 해결해 주는 대신 다음 해에 새롭게 싹을 얻고 뿌리를 얻는 일이라고 기뻐하다니!
어디 그뿐인가. 집 앞 언덕배기 감나무에 호박 한 덩이가 열려 있는 것을 본 그는 생각한다. ‘땅바닥을 기면 편안히 열매를 맺을 수도 있을 텐데 둔덕의 부드러운 풀 위에 얹어놓을 수도 있을 텐데’라고…. 그러나 곧 ‘넝쿨은 그곳에 길이 있었기에 걸어갔을 것’이라고 자위하는 시인이 조금은 무섭기도 했다. 소년가장이셨던 내 친정 오빠의 일생은 물론 배고픈 시대를 부모 대신 책임져야 했던 세대들의 언니 오빠 모두에게도 울컥 하는 내 가슴을 달래며 읽어드리고 싶다.
또 어디 그뿐인가. 냇가의 돌 위를 걸어가는 민달팽이, 햇살의 손가락만 닿아도 말라 바스라질 것 같은 부드럽고 연한 피부를 무방비로 열어 놓고 사는 민달팽이가 안쓰러워 아내가 배추 잎사귀로 알몸을 덮어주자 ‘치워라, 그늘!’ 하는 대목에서 더는 할 말이 없어야 옳다는 생각에 미친다.
박라연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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