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호택 칼럼]‘김일성 민족’ 찬가에 파묻힐 대통령

  • 입력 2007년 9월 28일 21시 14분


북한 어린이를 돕는 인도적 사업을 펴는 N 씨는 8월 말 평양 5·1경기장에서 아리랑 공연을 관람했다. 큰비로 평양 시내를 관통하는 보통강(대동강의 지류)이 범람했지만 아리랑 공연은 계속되고 있었다. 그는 2년 전에도 정동영 당시 통일부 장관과 함께 아리랑을 본 적이 있어 이번이 두 번째 관람이다.

아리랑은 매년 내용이 조금씩 달라진다. 그는 “2007년판 아리랑은 마지막 장이 ‘김일성 민족’의 영원무궁을 기원하는 내용으로 바뀌었다”고 말했다. 새 아리랑에서는 ‘김일성 민족’과 ‘태양 조선’이라는 구호가 반복된다. 북에서 태양은 김일성이다. 4월 15일 김일성 생일을 북에선 태양절이라 부른다.

N 씨는 함께 관람한 남측 일행 전원이 “노무현 대통령이 아리랑 공연을 보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일치된 의견을 보였다고 밝혔다. “한민족을 ‘단군 민족’도 아니고 ‘김일성 민족’이라고 부르더군요. 노 대통령이 ‘김일성 민족’의 영원무궁을 기원하는 공연을 관람하는 것은 ‘김일성 민족으로 하나 됨’을 인정해 주는 것이 아닐까요.”

청와대는 홈페이지에 ‘언제까지 시대의 변화를 거부할 것인가’라는 글을 싣고 “매들린 올브라이트 전 미국 국무장관도 2000년 방북 시 아리랑 공연의 전신인 ‘백전백승 노동당’을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나란히 앉아 관람했다. 그게 외교이고 협상”이라고 주장했다.

‘태양 조선’ 선전에 뭐라 반응할까

그러나 올브라이트가 관람한 ‘백전백승 노동당’과 노 대통령이 보는 아리랑은 버전이 다르고, 그 의미도 달라질 수밖에 없다. 올브라이트는 관람 뒤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미국 기자들의 질문을 받고 “굉장했습니다”라고 말하고 나서 “10만 명이 일사불란하게 춤추는 일을 가능하게 만들려면 독재자가 있어야 할 겁니다”라고 덧붙였다.

아리랑 공연이 끝나면 모든 관중이 일어나 박수를 치며 경의를 표한다. 언젠가 우리 정부의 공무원이 이 대목에서 일어나지 않고 어정쩡하게 앉아 있다가 곤욕을 치른 적도 있다. 노 대통령은 아리랑 공연이 끝났을 때 어떤 태도를 취하고, 어떤 코멘트를 할지도 쉽지 않은 고민거리일 것이다.

2000년 6·15 정상회담 때 북은 김대중 대통령에게 김일성 미라가 안치된 금수산기념궁전을 방문할 것을 집요하게 요청했다. 김정일은 “한국을 방문한 외국 국가원수들은 동작동 현충원 국립묘지를 참배하지 않느냐. 금수산기념궁전은 북한의 국립묘지”라는 논리로 남쪽을 설득하려고 했다. 김정일은 남쪽의 금수산기념궁전 방문 불허 금기를 깨려는 시도로 2005년 서울에서 열린 8·15 민족대축전에 참가한 북쪽 대표단을 국립묘지에 참배시키기도 했다.

북은 2차 남북 정상회담에서 노 대통령의 금수산기념궁전 참배를 포기하는 대신에 ‘태양 조선’과 ‘김일성 민족’의 선전극을 관람하고 ‘예(禮)’를 갖추게 하는 전략으로 전환한 것 같다. 백종천 대통령통일외교안보실장은 “북한이 민감한 내용에 대해선 우리 쪽을 고려해 수정하고 있는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그러나 10만 명이 출연해 ‘김일성 조선’ ‘김일성 민족’의 과거 현재 미래를 표현하는 공연을 짧은 기간에 어떻게 얼마나 수정할 수 있을지 짐작하기 어렵다. 그저 북의 요청을 수락하기 위한 구실이라는 생각이 든다.

이재정 통일부 장관이 아리랑 공연과 관련해 “인권 문제는 지역의 환경과 특성에 따라 다르게 해석돼야 한다”고 한 것은 망발이다. 아리랑 공연은 ‘모든 아동은 폭력과 학대로부터 보호받아야 한다’는 유엔 아동권리협약을 위반했다. 아리랑은 연습기간만 반년이 넘게 걸린다. 굶주린 아이들이 장시간 햇볕에 노출돼 쓰러지고 실수하면 모진 체벌이 따른다고 탈북자들이 증언하고 있다.

‘아동학대 쇼’ 보며 北인권 눈감기

서구 선진국 인권단체들은 아프리카 국가와 방글라데시 인도네시아 등에서 아동 노동을 통해 생산되는 신발 의류 완구의 불매운동을 벌인다. 북한은 아리랑의 입장료로 주석단 300달러, 1등석 150달러, 2등석 100달러를 받는다. 아동 노동을 통해 돈벌이를 하고 임금을 착취하고 있다.

남북 정상이 지켜볼 공연을 위해 북한 아동들은 추석 명절에도 불려나와 힘겨운 연습을 했을 것이다. ‘아동 학대 쇼’를 자랑거리라고 내놓는 북의 집권세력에 ‘부끄럽게 생각하라’고 말하지는 못할망정 대통령이 그것을 보고 박수를 치는 것은 인권 측면에서 금수산기념궁전 참배보다 더 부끄러운 일이다.

황호택 수석논설위원 hthwa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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