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미있는 일이다. 다들 차에 내비게이션을 장착하는데 막히는 길은 더욱 막힌다. 내비게이션은 가장 빨리 가는 길을 가르쳐 주는 기계인데, 다들 그 기계를 달았기 때문에 가장 빨리 가는 길은 가장 늦게 가는 길이 된다. 내비게이션은 왜 가장 빠른 길이 가장 느린 길이 되는 것인지 이해하지 못한다. 당연히 내비게이션은 그토록 열심히 일했건만 삶은 왜 힘들어지기만 하는지 설명하지 못한다.
그렇다면 이런 질문은 어떨까? ‘부채는 있는데, 홍조 띤 뺨은 어디 있나요?/칼은 있는데, 분노는 어디 있나요?’(‘박물관’) 가족사진첩 속에 형제들과 찍은 사진은 남아 있는데, 그 웃음은 어디로 갔을까? 폴란드 시인 비스와바 심보르스카의 시집 ‘끝과 시작’을 읽으면 우리가 왜 과거나 미래에, 또 여기가 아닌 다른 어딘가에서 웃지 못하고, 지금 여기에서만 웃을 수 있는지 알게 된다. 시인은 박물관에 가서 그 사실을 깨닫는다. 시인에게 박물관이란 오래된 유물을 보여 주는 곳이 아니라 100년 정도면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인간을 보여 주는 극장이니까.
박물관은 역설의 극장이다. 전시된 부채는 그 부채로 가리던 홍조 띤 뺨을 보여 준다. 날이 선 칼은 그 칼을 움켜쥐고 적을 향해 돌진하던 기사를 보여 준다. 나도 국립중앙박물관에서 반가사유상을 본 적이 있다. 어둠 속에서 홀로 조명을 받고 있던 반가사유상은 이렇게 말했다. 내가 만들어지던 시대에 살았던 인간들은 지금 먼지가 됐노라. 그런 점에서 우리는 반가사유상을 바라볼 때, 그 당시 인류 전체의 웃음과 울음을 이해할 수 있어야만 한다.
지금 이 순간, 우리가 아이로도 웃을 수 없고, 해골로도 웃을 수 없다면 어떻게 해야만 하나? 우리 모두는 지금 이 순간 바로 여기에서 한 발짝도 벗어날 수 없다. 그러므로 웃고 싶다면 지금 여기에서 웃어야만 한다. 세상의 모든 내비게이션, 일류 대학으로 가라던 선생님들, 성공하려면 빈둥거리지 말라고 말했던 처세서들은 다 틀렸다. 행복으로 가는 가장 빠른 길은 없다. 우리는 인간이므로 지금 여기에서 행복하거나 그렇지 않거나 둘 중 하나만을 택할 수 있을 뿐이다.
김연수 소설가
구독
구독
구독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