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과 소설가가 추천하는 가을 시선 20]<11>내 영혼은…

  • 입력 2007년 10월 10일 03시 02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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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향 언저리에서 나지 않는 열매들이 추억을 채우네/이국의 푸성귀들이 내 살을 어루네/사랑은 뜻대로 되지 않았으며/입술은 사랑의 노래로 헤어졌네/과거는 소멸되지 않았으나 우리는 소멸했네

―‘그날의 사랑은 뜻대로 되지 않았네’》

누구에게나, 처음 보는 순간 이유 없이 가슴에 와 박힌 시가 있을 것이다. 1990년대의 어느 날, 허수경 시인의 시가 내겐 그랬다. ‘마음의 무덤에 나 벌초하러 진설 음식도 없이 맨술 한 병 차고 병자처럼, 그러나 치병과 환후는 각각 따로인 것을 킥킥 당신 이쁜 당신……, 당신이라는 말 참 좋지요, 내가 아니라서 끝내 버릴 수 없는, 무를 수도 없는 참혹……, 그러나 킥킥 당신’(‘혼자 가는 먼 집’)

‘킥킥’이라는 장난스러운 웃음소리와 ‘당신’이라는 다감한 호칭이 서로 스미고 섞이어 만들어 내는 이 절묘한 경지라니! 내가 아니라서 끝내 버릴 수도 무를 수도 없는 참혹, 당신. 사랑의 본질에 관하여 이보다 더 적확하게 해석하는 문장을 아직도 나는 알지 못한다.

그리고 2001년 허수경 시인의 새 시집을 만났다. 그때나 지금이나 독일에 머물고 있는 시인은 시인의 말에 ‘8년 만에 시집을 묶는다며 시를 쓰고 싶은 마음만이 간절한 세월이었다’고 썼다. 그 시집 ‘내 영혼은 오래되었으나’를 오랜만에 꺼내어 펴 보았다. 군데군데 연필로 밑줄이 그어져 있다.

‘과거는 소멸되지 않았으나 우리는 소멸했네//오 오 나는 추억을 수치처럼 버리네/내 추억에서 나는 공중변소 냄새’(‘그날의 사랑은 뜻대로 되지 않았네’) ‘술병 깨고 손에 피를 흘리며 여관에서 혼자 잠, 여관 들어선 자리 밑 옛 미나리꽝 미나리 순이 걸어 들어와 저의 손으로 내 이마를 만지다, 아픔은 아픔을 몰아내고 기쁨은 기쁨을 몰아내고 장님인 시절 장님의 시절은 그렇게 가고……’(‘아픔은 아픔을 몰아내고 기쁨은 기쁨을 몰아내지만’) ‘아무도 기록하지 않을 나, 그러나 영혼을 믿는 나, 기억들이 섬광처럼 사라지는 것을 늙은 늑대 같은 외투를 입고 내 영혼은 멍하게 지켜보리라.’(‘늙은 들개 같은 외투를 입고’)

당시 내게는 무엇이 그리 간절했기에 그 문장들 앞에서 한동안 고개를 끄덕였던가. 2001년의 내 영혼이 흔들렸던 기척들을, 늙은 늑대 같은 외투를 입은 2007년의 내가 물끄러미 바라다본다. 어떤 시집을 꺼내 읽는 것은 잃어버린 시간을 호출하는 일일지도 모른다. 누렇고 고요한 책갈피마다, 돌이킬 수 없는 기억의 흔적들이 불완전하게 깃들어 있다.

허수경 시인의 시는 천연하고 덤덤하고 나직하게 생의 불가사의를 응시한다. 그래서 더 아프다. 아프지만, 고통의 심연을 어쩌면 천연하고 덤덤하고 나직하게 지나갈 수 있으리라는 작은 희망을 품게 한다. 가령 이 가을 당신이 고독 혹은 고통에 몸부림치고 있다면, 이런 시편 앞에서 어찌 위안받지 않을 도리가 있을까.

‘숨죽여 기다린다//숨죽여, 이제 너에게마저 내가 너를 기다리고 있다는 기척을 내지 않을 것이다//버림받은 마음으로 흐느끼던 날들이 지나가고//겹겹한 산에/물 흐른다//그 안에 한 사람, 정막처럼 앉아 붉은 텔레비전을 본다’(‘몽골리안 텐트’)

정이현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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