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횡설수설/육정수]죄질(罪質)

  • 입력 2007년 11월 2일 03시 03분


조선시대 성종 19년에 한 사노(私奴)가 아버지의 머리카락을 쥐고 흔든 죄로 붙잡혀 갔다. 형조(刑曹)가 조사를 마친 뒤 “법률상 부대시참(不待時斬)에 해당한다”고 아뢰자 임금은 “그대로 시행하라”고 명했다. 부대시참은 죄질이 무거운 사람을 판결 즉시 참형하는 걸 말한다. 같은 참수형이라도 춘분(春分)에서 추분(秋分) 사이 만물이 소생하는 시기는 피해서 때를 기다렸다가 행하는 대시참(待時斬)도 있다. 죄질에 따라 죄인을 달리 대우한 것이다.

▷중종은 죄질이 나쁜 경우에도 인정(人情)을 베풀려고 애쓴 임금이다. 한번은 박지매라는 강도의 처형 시기를 놓고 “지금은 만물이 소생하는 때라 형을 집행하기에는 내 마음이 몹시 미안하다. 가을까지 기다리는 게 어떠한가”라고 물었다. 그러나 대신은 “그는 잔인한 살인자라 경우가 다릅니다. 죄에는 경중이 있기 때문에 이런 사람은 지체하지 말아야 마땅합니다”라고 아뢰었다. 중종은 마지못해 부대시참을 허락했다.

▷벌을 주려면 죄의 유무(有無)를 먼저 가린 뒤 유죄로 판단될 경우 그 경중(輕重)과 성질, 즉 죄질을 따져야 한다. 이인제 민주당 대선 후보가 대선출마설이 파다한 이회창 씨를 “나보다 더 죄질이 나쁜 사람”이라고 비판했다. 1997년 대선 당시 아들의 병역 문제로 한나라당 이회창 후보의 지지율이 10% 안팎으로 급락했을 때 대안(代案)으로 나섰던 자신과, 아직 요지부동인 한나라당 이명박 후보의 지지율 하락을 가정해 ‘스페어’로 나온다는 이회창 씨는 다르다는 논리다.

▷그의 주장은 10년 전 자신의 경선 불복 독자 출마도 ‘유죄’임을 인정했다는 점에서 눈길을 끈다. 경선에서 결정된 후보의 지지율이 하락하면 대안 출마에 정당성이 부여된다는 생각은 애당초 억지다. 그는 김대중 씨의 당선에 결정적 기여를 한 끝에 ‘경선 불복자 대선 출마 금지’ 규정을 만드는 계기를 제공했고, 이 당 저 당 옮겨 다니는 철새의 길을 걸었다. 그런 이인제 씨한테서 “죄질이 더 나쁘다”는 말을 듣는 이회창 씨는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육정수 논설위원 sooya@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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