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과 내일/방형남]노무현 부시 김정일의 시간 싸움

  • 입력 2007년 11월 21일 03시 00분


지도자 A=난 임기가 3개월밖에 남지 않았어. 후임자 선거도 한 달 뒤로 다가와 쫓기는 심정이야. 개혁해야 할 대상도 많고 혁신할 것도 많은데 왜 이렇게 시간이 빨리 가는지….

지도자 B=벌써 그렇게 됐나. 난 임기가 1년 남았으니 자네보단 형편이 낫다고 해야 하나. 그래도 조급한 건 마찬가지야. 손봐야 할 야만 정권도 남아 있고, 테러와의 전쟁도 더 해야 하는데 마음대로 안 돼 답답하네.

지도자 C=쯧쯧, 자네들 신세가 처량하군. 시한부 인생인 자네들은 역시 내 상대가 못 된다는 사실이나 똑똑히 기억하도록 하게. 나는 자네들 후임자 다룰 궁리나 하겠네.

남한 경제 학습 기회 외면한 북한

노무현 대통령, 조지 W 부시 미국 대통령,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이 지금 만나 흉금을 털어놓는다면 이런 말도 오갈 수 있지 않을까. 퇴임을 앞둔 지도자와 임기라는 단어가 사전에 없는 지도자 간의 게임이란 측면에서 보면 민주국가 지도자는 초조하고 독재자는 느긋하다. 누가 판을 유리하게 이끌지는 물을 필요도 없다. 민주와 정의의 시각에서 보면 안타까운 노릇이지만 엄연한 현실이다.

시간은 김 위원장의 큰 무기다. 지난주 서울에서 열린 남북 총리회담도 시간과의 싸움이었다. 남북 정상회담을 엄청난 업적으로 꼽는 노무현 정부는 어떻게든 총리회담의 결과를 풍성하게 만들어야 했다. 총리회담이 깨지면 정상회담은 곧바로 모래성으로 변한다. 합의가 되지 않는다면 다음번 회담에서 협상을 계속할 시간적 여유도 없다. 김영일 북한 총리의 서울 방문 자체가 초읽기에 몰린 노 대통령에게는 압박이었다. 남북 총리회담은 오직 합의만을 위한 회담이었다.

정부는 남북 대화를 ‘평화와 번영’을 위한 진전이라고 강변하지만 스스로 초래한 불리한 싸움을 감출 수는 없다. 서울 방문 직전 베트남을 찾은 김 총리의 행보를 떠올리며 북한의 변화를 예견했던 장밋빛 분석은 무참하게 빗나갔다. 김 총리는 남한 경제를 배울 뜻이 전혀 없었다. 베트남에선 3박 4일을 주로 경제발전 현장답사로 보낸 그였지만 남한에선 단 한 곳의 기업도 방문하지 않았다. 북한 총리가 선진경제를 배울 생각이 있다면 왜 남한 경제 학습 기회를 외면했겠는가. 그런 북한과 경협(經協)을 매개 삼아 평화와 번영을 이루겠다는 정부의 주장은 잠꼬대만큼이나 공허하다.

부시 대통령도 김 위원장이 펼친 시간과의 싸움에 말려들었다. 그는 워싱턴을 방문한 후쿠다 야스오 일본 총리에게 북한의 테러지원국 명단 삭제와 일본인 납치 문제를 연계하겠다는 약속을 끝내 하지 않았다. 사실상 북한 손을 들어 줘 최대 맹방의 지도자를 머쓱하게 만든 것이다.

부시도 임기 말이라 약해졌다. 이라크전쟁은 오래전에 수렁에 빠졌고 최근에는 파키스탄과의 관계마저 서먹해졌다. 9·11테러 이후 가장 적극적으로 대(對)테러전에 동참했던 페르베즈 무샤라프 파키스탄 대통령은 부시의 민주화 요구를 무시하고 비상사태를 선포했다. 무샤라프가 부시를 농락했다는 말까지 나온다. 부시는 궁지에서 빠져나오기 위해 ‘북한 변수’를 대타로 선택했다. 궁여지책의 변화다.

韓美, 한심한 對北경쟁 중단해야

노 대통령의 ‘오로지 북한’도, 부시의 ‘대타로서의 북한’도 이기는 전략은 아니다. 남한과 미국 대통령이 시간에 쫓겨 앞뒤 가리지 않고 북한에 매달리는 한심한 경쟁은 중단되어야 한다. 우리의 차기 정부가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이다. 이번 대선에서 국민이 그 발판을 마련해 줘야 한다. 그래야 부시에게 “정신 차리라”는 충고를 할 수 있다.

세 지도자 가운데 올겨울을 따뜻하게 맞을 사람은 김 위원장뿐이다. 그는 이런 말을 하며 호탕하게 웃고 있지 않을까. “시간에 쫓기는 자는 시간에 구애받지 않는 자를 이길 수 없다.”

방형남 논설위원 hnbha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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