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실이 꿈이 되는 시간, 크리스마스
세상에서 가장 유명한 크리스마스 이야기는 무엇일까. 동방박사 이야기, 아니면 스크루지 영감이 세상과 화해하는 찰스 디킨스의 ‘크리스마스 캐럴’, 아니면 머리카락을 잘라 남편의 시곗줄을 산 아내와 시계를 팔아서 아내의 머리핀을 산 남편의 이야기인 오 헨리의 ‘크리스마스 선물’. 너무나 유명하고 낭만적이고 착하고 교훈적인 크리스마스의 기적 같은 이야기 말고 새로운 크리스마스 이야기는 없을까.
‘세상의 모든 크리스마스’는 폴 오스터, 트루먼 카포티, 블라디미르 나보코프, 존 치버, 미셸 투르니에 등 세계적 작가들의 크리스마스 이야기 19편을 엮은 책이다. 의외의 소득은 내가 좋아하는 나보코프나 투르니에, 오스터의 이야기가 아니라 카포티의 ‘크리스마스의 추억’이었다. 카포티의 비블리오그래피에 항상 ‘크리스마스의 추억’이 있었는데 사실 ‘뭐 크리스마스 이야기가 거기서 거기지’ 하고 한 번도 찾아볼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런데 가슴 찡하면서도 산뜻한 이 이야기가 정말 좋았다.
이 책에는 어떤 작가의 이야기가 가장 좋았느냐 혹은 어떤 이야기에서 어떤 부분이 가장 기억에 남느냐를 묻고 대답하면서 사람을 알아 갈 수도 있을 것 같은, 다양한 크리스마스 이야기가 실려 있다. 크리스마스에도 전쟁은 계속되고 살인이 일어나고 부부싸움을 하고 부모와 자식은 소원하고 혼자서 식사를 해야 한다. 그래도 크리스마스니까 화해를 하고 용서를 하고 선물을 하고 아름다운 환상을 보기도 한다.
천편일률적인 평화와 화해와 사랑과 축제의 크리스마스가 아니라 비애나 자조, 우울 같은 크리스마스에만은 사양하고 싶은 감정들이 크리스마스라서 더 강하고 위협적일 수도 있다는 사실을 확인시켜 주기도 한다. 이를테면 존 치버의 ‘크리스마스는 가난뱅이에게 슬픈 날’이나 크리스마스 폐지협회를 만드는 뮤리엘 스파크의 ‘낙엽 쓰는 사람’, 그리고 산타클로스 아르바이트를 하는 이야기도 있다.
생각해 보니 진짜 산타클로스도 크리스마스에 우울할지도 모르겠다. 남들 놀 때 놀지도 못하고 밤새워 일해야 하고, 그럼에도 제대로 임무를 완수하지 못해 비난받을 가능성도 있다. 나이가 들면 사랑과 화해와는 다른 크리스마스의 뒷면에 익숙해진다. 명백한 것은 세월이 흐를수록 누군가와 마지막으로 보낸 크리스마스의 기억이 늘어난다는 것이다.
어쩌면 ‘그해 크리스마스에는’ 하고 크리스마스 이야기를 하나 둘 모으는 것이 인생일지도 모르겠다. 오스터는 ‘오기렌의 크리스마스 이야기’에서 “어떤 이야기를 믿는 사람이 하나라도 있다면, 어떤 이야기도 진실일 수도 있다”고 말하는데, 그렇다면 나는 요정이 나타나 소원을 들어주는 자넷 윈터슨의 ‘오브라이언의 첫 크리스마스’ 이야기를 믿고 싶다. 우리의 일상이 꿈을 현실로 만들기 위한 시간이라면 크리스마스는 현실을 꿈으로 만드는 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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