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울한 예상 깨어 버린 자원봉사자들
만리포에 도착해 두 가지 사실에 놀랐다. 우선 바다가, 모래사장이 예상보다 깨끗한 게 신기했다. 내가 본 푸른 파도와 정갈한 모래는 내가 보지 못한 보름 동안의 ‘기적’이었다. 끝도 없이 퍼내고, 씻어 내고, 닦아 냈을 어느 이름 모를 사람들이 만들어 낸. 해변도로에 줄줄이 서 있는 커다란 고무 드럼통들, 아직도 기름이 덕지덕지 엉겨 있는 삽과 바가지들, 검게 절어 있는 헝겊 무더기 등이 그동안의 ‘사투’를 웅변했다.
또 다른 놀라움은 뭐라 딱히 표현하기 어려운, 그러나 분명히 존재하는 질서 정연함 같은 것이었다. 많은 외지 사람이 전세버스로, 노선버스로, 승용차로 몰려오고, 이동하고, 일하고, 돌아가는데도 시끄럽다거나 부산하다는 느낌이 들지 않았다. 사람들의 표정에 해답이 있었다. 그들의 얼굴엔 걱정과 각오가 혼재한 숙연함이 있었다.
자원봉사자의 모습을 직접 보고 싶었던 건 마음의 빚 때문이었다. 기름 유출 사고가 일어난 지 나흘 후 나는 ‘1997년 1월에 일본 후쿠이(福井) 현 미쿠니(三國) 정 앞바다에서도 비슷한 사고가 일어났지만 30만 명의 자원봉사자가 몰려와 석 달 만에 해안의 기름 대부분을 제거하는 기적을 이뤄 냈다’는 요지의 기사를 썼다(본보 12월 11일자 A12면). 기사를 쓰면서 우리도 그렇게 됐으면 하는 기대도 있었다. 그러나 ‘그렇게 될까’ 하는 회의가 더 강했던 게 솔직한 고백이다.
그러나 나는 얼마 안 가 나의 속내를 부끄러워해야 했다. 일본 인구의 절반도 채 안 되는 나라에서, 일본이 석 달 만에 이룬 30만 명이라는 자원봉사자 기록을 불과 보름 만에 깨 버린 것이다. 그것도 일본보다 배나 되는 기름에 맞서.
미쿠니의 자원봉사자들을 소개한 책을 읽으며 나는 이 대목에서 가장 감동했다. “수백 명이나 되는 자원봉사자가 해변의 보석이라도 되는 듯 자갈을 닦고 있었다. 한 개 한 개씩, 정성껏 헝겊 조각으로 기름을 닦아서는 바다로 돌려보냈다. 모두들 묵묵히 작업에 몰두하고 있었다.” 설마 그렇게까지 했을까 하는 의문마저 들었다.
그런데 그런 광경이 만리포 곳곳, 바로 눈앞에서 펼쳐지고 있었다. 자원봉사자들은 자신의 부엌에 있는 그릇을 닦듯, 아이의 책상을 훔치듯, 벽에 낀 때를 벗겨 내듯 자갈과 갯바위와 방파제에 매달려 말없이 기름을 닦아 내고 있었다. 겨울바다는 그들의 정성으로 뜨거웠다.
봉사는 남에게 베푸는 것 같지만, 종국엔 스스로를 변화시킨다. 진로를 고민하며 미쿠니에서 자원봉사자들의 건강을 돌봤던 한 젊은 여성은 간호사의 길을 택했다. 그는 눈보라가 몰아치는 바닷가에서 입었던 작업복을 ‘보물’이라고 부른다. 힘든 일이 있을 때마다 꺼내 보며 용기를 얻는다는 것이다.
태안의 자원봉사자들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이번 자원봉사는 자연과 인간 사이에서 벌어진 갈등을 화해로 이끄는 작업이다. 자연은 인간의 경솔함에 분노하지만 뉘우치는 인간은 용서한다는 사실을 목격한 건 값진 경험이다.
관광객으로 가는 것도 훌륭한 봉사
취재를 마치고 해안을 빠져나오는데 구세군이 운영하는 무료 밥차에서 손짓한다. 국밥이라도 들고 가라고. 구수한 냄새를 그냥 지나쳤다. 나는 작업복도 입지 않았고, 손도 깨끗했다. 밥을 달라고 할 용기가 나지 않았다.
그 순간 이런 생각이 들었다. 해넘이와 해돋이 여행은 힘들겠지만 내년 여름휴가만이라도 이곳으로 오면 어떨까 하는. 피해를 본 지역 주민들이 호소하고 있지 않은가. 자원봉사도 고맙지만 관광객도 중요하다고. 내년 여름 만리포에 다녀와야만 미안한 마음이 조금이나마 덜어질 것 같다.
심규선 편집국 부국장 ksshim@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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