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년시론/신경숙]첫새벽, 소망의 등불을 내걸고

  • 입력 2007년 12월 31일 20시 29분


어렸을 때 나의 어머니는 새해가 다가오는 전날 밤이면 재래식 부엌의 가마솥에 물을 끓여서 형제를 목욕시키고 새로 입을 옷을 챙겨 일일이 머리맡에 놓아두고 등불을 켜서 마루에 내걸었다. 그 사이 아버지는 한 해 동안 빌려 썼던 것을 돌려주러 다니고 빌려 주었던 것도 찾아왔다. 농기구가 제자리에 돌아오고 외상값이 갚아졌다.

어머니가 기름 아까운 줄 모르고 밤새도록 마루에 불을 켜 두었던 밤은 새해를 앞둔 밤뿐이었다. 묵은해의 상처를 보내고 새해의 희망을 받아들이라는 소망의 등불이었을 것이다. 목욕을 하지 않겠다고 버티다가 어머니의 커다란 손바닥으로 등짝을 얻어맞아 얼얼해진 등을 이불 속에 파묻으면 마루에 걸어 놓은 등불이 눈 속으로 한 가득 쏟아져 들어오곤 했다.

젊은이들이 낙망하지 않게

한 해의 마지막 날 잠을 자면 눈썹이 하얘진대서 자꾸 눈썹을 매만져 보면서도 목욕까지 마쳐 노곤해진 몸이라 밀려드는 잠을 물리칠 수가 없었다. 그래도 끝까지 자지 않으려고 버틸 때면 창호 문에 비치는 마루의 등불이 은은히 눈 속으로 쏟아져 들어오곤 했다. 그때면 나도 모르게 마음속의 소망을 가만히 빌어 보곤 했다. 어린 마음에도 새해라는 느낌을 소중하게 생각했던 모양이었다.

2008년 새해의 첫날 일출은 독도에서 맨 먼저 뜬다고 한다. 오전 7시 26분 20초에.

지금까지 새해맞이 해를 보러 길을 떠난 적이 두 번 있었는데 나는 그때마다 해를 볼 수 없었다. 20대가 막을 내릴 무렵 그 허전함 때문에 전날 자정 무렵에 동해 쪽으로 길을 떠났는데 우리 일행은 동해에 도착도 하지 못한 채 길에서 아침을 맞았다.

동해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해가 중천에 떠올라 있었다. 해맞이를 위해 길을 떠나는 사람이 그렇게 많음을 처음 알았다. 그 후로는 한동안 누가 새해 일출을 보러 가자고 하면 그날의 고생이 떠올라 지레 안 간다며 손 먼저 내저었다.

그 고생을 깜박 잊고 이태 전에 이번엔 서해 쪽으로 길을 잡은 적이 있었는데 그쪽이라고 다르지 않았다. 목적지 근처에 가지 못했는데 도로가 주차장이었다. 인내심이 없어 중도에 포기하고 집 쪽으로 돌아오는데 아직 어둠에 잠겨 있는 첫새벽에 새해의 해를 보러 산으로 올라가는 사람이 수도 없이 많아 또 한 번 놀란 적이 있었다. 올해도 다르지 않을 것이다. 아니 어쩌면 올해는 새해 첫날인 오늘 떠오르는 해를 바라보며 소망을 빌고 싶은 사람이 더욱 많았으리라.

지난 한 해는 사회적으로 깊이 파고 들어가 정리해야 할 사건이 연달아 터져 제대로 분석조차 못한 채 또 다른 사건 앞에 서는 급박한 한 해였다. 따지고 보면 지난해의 일만도 아니다. 한 달 전에 일어났던 일을 깊이 생각하고 정리할 틈도 없이 또 다른 새로운 놀라운 일 앞에 서 있는 일이 언제부턴가 우리 사회에 만연하다. 그 결과로 불신과 분열의 골이 깊어질 대로 깊어진 것 같다. 거의 치유책이 없어 보일 지경까지 온 것 같다. 불과 일년 전의 일이 십여 년 전의 일처럼 느껴지는 이유도 그 탓일 것이다.

몇 년째 일관되게 계속되는 일은 젊은이들이 학교를 졸업하는 대로 실업자가 되는 현상이다. 나에게는 어떤 일보다도 이 점이 가장 절망스러운 일로 받아들여진다. 젊은이들이 자기가 속한 사회에서 희망을 보느냐 절망을 보느냐의 기준으로 사회가 발전적인지 아닌지를 알 수 있다고 생각하는 나로서는 우리 사회의 가능성 많고 아름다운 젊음이 낙망하는 걸 보는 일은 우울하다.

날로 심각해지는 환경문제 역시 우리의 신경을 곤두세우게 한다. 검은 재앙이라고밖에 말할 수 없는 원유 해양 유출사고로 인해 사람들의 절망은 말할 것도 없고 태안반도 어느 바닷물 속에서 살던 소나무마저 기름띠를 두르고 죽어 폐기물 처리가 되어 실려 나가는 걸 봐야 하는 상처를 어떻게 표현할 수 있을까.

나무 한 그루 심는 마음으로

새해가 왔다고 해서 어제의 시간과 딱 갈라설 수 있는 건 아니지만 근심이 많았던 지난해여서인지 2008년의 새로운 시간을 맞이하는 마음은 나만이 아니라 누구나 각별한 것 같다. 어떤 이는 새 대통령과 함께 시작하는 새해이기도 해서라는 이유를 대지만 딱히 그런 것 같지만은 않다. 선거권을 갖게 된 후로 이번처럼 대통령 선거가 끝난 뒤의 이런 조용한 분위기를 나로서는 처음 본다.

이전엔 자신이 지지하는 분이 당선인이 되었든 아니든 흥분과 열기가 있었는데 이번엔 대체로 침착하다. 정치에 대한 기대를 크게 갖지 않는다는 뜻이기도 할 것이다. 오히려 무엇이든 바닥에 닿으면 솟아오를 수밖에 길이 없듯이 지금의 불신과 분열을 더는 두고 볼 수 없다는 우리의 마음이 스스로를 치유하고자 하는 기척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집안에 어린아이가 태어나면 나무를 한 그루 심었던 마음으로 새해를 맞이해 늘 어제보다는 나은 오늘이 되기를 기원해 본다.

신경숙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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