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 씨는 1991년 2월부터 만 2년간 부총리 겸 경제기획원 장관으로 노태우 정부 경제팀을 이끌던 최고위 중앙관료 출신이다. 그리고 당시 노 정부는 ‘정권 차원’에서 규제를 개혁하겠다며 총리 직속의 민관합동 규제완화위원회를 가동했다.
YS는 1993년 2월 취임사에서 3대 개혁을 선언했다. 첫째는 부정부패 척결, 둘째는 경제 살리기, 셋째는 국가 기강 바로잡기였다. 그는 경제 살리기와 관련해 “규제와 보호 대신 자율과 경쟁을 보장할 것”이라고 다짐했다. 이틀 뒤 처음 주재한 국무회의에서도 “국민에게 불편을 주는 각종 규제를 대폭 완화해 국민이 새로운 문민(文民)시대를 맞이했다는 것을 피부로 느끼도록 해야 한다”는 어록을 남겼다.
고건 씨는 YS 정부 말기이던 1997년 3월 국무총리가 되자 “규제를 혁파(革罷)하겠다”고 밝혔다. 당시 동아일보 경제부장이던 나는 ‘혁파?’라고 혼잣말을 하며 반신반의했던 기억이 난다.
제3공화국식 官治구태 여전
이듬해인 1998년 취임한 김대중(DJ) 대통령은 “기업의 족쇄를 풀어주겠다”며 규제 완화를 더욱 강조했다. 그해 4월 행정규제기본법이 제정되고 국무총리를 위원장으로 하는 규제개혁위원회가 발족해 변화에 대한 기대를 키웠다. DJ는 또 ‘원스톱 서비스’의 완전한 실현을 선언했다. 투자에 필요한 모든 행정 절차를 ‘원샷’에 처리해주겠다는 것이었다. 숫자에 밝은 DJ는 규제 건수를 절반으로 줄이겠다며 실제로 숫자를 외우기도 했다.
하지만 바로 그 DJ 정부가 지나가고 노무현 정부마저 5년을 마감하려는 지금, 기업이 목청 돋워 간청하고 있는 것이 규제 완화다. 세계는 분초(分秒) 단위로 변한다는데 이 나라의 규제 시계(時計)는 정권이 몇 번 바뀌어도 변함없이 캄캄한 밤이다.
노무현 대통령은 비판언론과 열심히 싸우는 (척하는) 관료들을 더 많이 ‘내 편’에 두기 위해 정책 실패, 행정 실패, 과잉 규제에 한없이 관대했다. 신상필벌(信賞必罰)의 원칙은 무너졌다. 관료들은 정권 코드에 장단 맞춰주는 대가로 시장(市場)과 기업에 대한 규제권력을 한껏 휘두를 수 있었다.
특히 공정거래위원회의 대기업집단 출자총액, 기업 지배구조 등에 관한 규제 및 개입은 끈질겼다. 기업 지배구조를 획일적으로 지주회사 형태로 몰고 가려는 것은 정부가 기업을 관리하기 쉽도록 하려는 행정 편의주의에 바탕을 두고 있다. 정부가 관리하기 쉬운 기업 지배구조는 적대적 인수합병(M&A)을 당하기도 쉬운 구조다.
위원장과 원장이 같은 사람인 금융감독위원회와 금융감독원조차 금융기업들을 이중 규제한다. 건전성 감독만 제대로 하면 될 것을, 일상적인 경영관리(매니지먼트)와 운용(오퍼레이션)까지 시시콜콜 현장감사하는 제3공화국식 구태(舊態)가 잔존하고 있다. 이들이 과연 그럴 만한 안목과 실력을 갖추었는지부터 의문스럽다.
공무원 변해야 경제 선진화 가능
이명박 대통령 당선인은 “나의 정책 약속은 믿어도 된다. 내가 대통령이 되면 공무원들은 다 (나에게) 맞춰서 먼저 변할 것이다”고 말한 적이 있다. 작년 5월 한나라당 대선 예비후보로 한국신문방송편집인협회가 주최한 언론정책 토론회에 참석했을 때였다. ‘관료는 대나무 같다’는 말이 생각났다. 지조가 있다는 뜻이 아니라 속이 비어서 누가 정권을 잡든 그에 순응하고 따라간다는 뜻이다. 이 당선인도 공무원의 그런 속성을 염두에 둔 것 같았다.
그러나 군인 또는 ‘민주화 운동가’ 출신의 역대 대통령들은 약간씩 시간 차가 있었을 뿐, 결국 관료들에게 동화(同化)되는 길로 걸어갔다. 그 중대한 결과의 하나가 규제개혁의 실패였고, 그에 따라 아무도 ‘경제 대통령’이 되지 못하고 말았다. 갖가지 규제에 직접 고통 받고, 기가 막힌 규제의 폐해를 몸으로 체험했을 CEO 출신 대통령은 정말 다를 것인가.
배인준 논설주간 injoo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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