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물며 이 약점투성이 행성(行星)인 지구 도처의 인간이야 말할 나위 없지 않은가. 그 누구도 그 누구의 어느 곳도 약점 없이 어떻게 생겨났단 말인가.
몇 해 전의 어떤 비난이 잊혀지지 않는다.
남쪽에서는 아이 낳아 팔아먹고 북쪽에서는 아이 낳아 굶겨 죽인다. 그런 곳에서 축제는 무슨 축제란 말인가.
이 독설에 대해서 분개해 마지않아야 했다. 아예 무시해 버려야 했다. 그러는 너는 뭐냐, 네 나라는 몇백만 명을 가스로 인종청소하지 않았느냐라고 대들어야 했다. 그리고 돌아서서 남부끄러워해야 했다.
정작 그 다음이 있다.
악의든 아니든 누군가가 지적하는 그 약점이 전혀 근거 없는 것이 아니라면 그것을 없애는 일을 변화라고 정의하는 날이 반드시 오도록 해야 한다. 변화는 때로 창조보다 더 위대하다.
아니, 창조란 전혀 새로운 세계가 아니라 있었던 약점의 세계에 대한 있어야 할 최선의 세계인 것이다.
어린 시절 나는 새를 많이 그렸다. 수평선 위의 배 한 척도 자주 그렸다. 하얀 연기 뿜어내는 기차도 그렸다. 그 증기기관차가 끌고 가는 긴 열차의 그림 속에서 기적 소리가 들려오는 착각도 일어났다.
어느 날 아버지가 꾸짖었다. 왜 너는 한평생 살아가는 집은 그리지 않고 어디고 떠나는 것만 그리느냐고.
나는 한두 번 집을 그리다가 어느새 새가 되어 날아다녔고 배로 떠났고 밤 기차에 몸을 싣고 어디론가 떠났던 것이다.
그림은 내 상상 속의 목적지였다. 북만주 하얼빈(哈爾濱)과 치치하얼(齊齊哈爾)은 너무나 가고 싶었던 곳이었으므로 끝내는 그곳은 내가 다녀왔다는 허구가 되기에 이르렀다.
지난 50년 동안 내 노래 속에는 떠나는 길이 너무나 많다. 진리도 길이고 삶도 길이었다. 시간도 길이었다. 이제야 나는 한 채의 집을 그려 놓고 그 집 안의 나를 뒤늦게 노래해 본다. 실로 오랜만이다.
집은 내 무기와 주렁주렁한 장식을 다 내려놓는 곳이다. 내 맨몸에 어떤 권위도 부여할 필요가 없는 곳이다. 옷 벗어던지고 욕조에 잠겨 있는 동안 남몰래 울 수 있고 뉘우칠 수 있다.
집은 온갖 소외도 달래 주는 곳이다. 심지어는 죄조차도 안아 주는 곳이다.
집은 연인의 장소가 아니라 아내의 장소이고 남편의 장소이다. 집은 아이와 어머니의 장소이다. 오키나와(沖繩)의 무덤들은 어머니의 자궁에서 태어난 생명이 그 자궁으로 돌아간다는 신앙에 의해서 여자의 성기를 본뜨고 있다.
몇천 년 내내 있어 온 한국의 온돌방이야말로 옛 조상의 지혜이기 전에 집의 모성애를 표상한 것은 아닐까. 집이 가부장제의 거점이 된 것은 훨씬 뒤의 양반 성리학 덕분이 아닐까.
문풍지 부르르르 우짖는 겨울밤 온돌 아랫목이 간직하고 있던 그 온기야말로 어머니의 자궁에서 멀지 않은 것이다.
전국 방방곡곡에 떨쳐 일어선 고층 아파트의 시멘트 덩어리를 바라보며 집값 오름세 따위와는 상관없는 이런 머저리의 감회도 있는 것이다.
집! 이 세상 상처의 치유!
무심(無心)은 오래가지 못한다.
빈 들판을 거닐면서 어디다 눈길을 준다. 서남쪽 하늘의 푸르름이 잔뜩 바래 있다. 오전의 맑음이 오후의 흐림이 되는 것이 이치인지 모른다. 마치 소녀의 눈이 뒷날 노파의 탁한 눈이 되는 것처럼.
그런 흐릿한 하늘 속에 낮달 한 조각이 떠 있다. 누가 일부러 찾아내지 않으면 보일 까닭이 없는 그런 부재감으로 그것은 가만히 떠 있다.
무엇이 저렇게 존재할 수 있을까. 무엇이 저렇게 저 자신을 사라져 버릴 넋처럼 남길 수 있을까.
실재란 모든 부재 앞에서 용서를 빌어야 할 일이 많을 것이다. 지금 세상은 모든 것이 나다! 나다! 하고 드러내는 데 여념이 없다. 마치 저 자신을 그토록 드러내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다는 강박을 뒤집어쓰고 있는 듯하다.
광고 속의 인물은 광고를 바라보는 인물의 꿈을 반영한다. 현대 민주주의의 선거제도는 이런 인물들을 양산해 낸다. 현대 자본주의와 자유주의는 타인의 불행으로 자아의 행복을 담보할 때가 많다.
근대 이전의 왕권신수설은 차라리 순수한 권력 신앙이다. 근대란 오랜 염원의 나머지 드디어 자아를 드러내는 시대이다. 사회의 모든 원점은 자아이다. 이런 자아 드러내기와 이 자아중심주의 경쟁으로 사회구성체의 토대가 되고 있다.
이런 세상에서 나를 내세울 줄 모르는 삶의 무명성(無名性)은 실로 희귀하고 존귀스럽기까지 하다. 낮달 한 조각 아래에서 나는 나 자신의 이름으로부터 얼마나 구애받지 않는가를 스스로 묻는다.
저 겸재(謙齋)의 산수화 한 구석지에 점묘(點描)된 처사 나부랭이나 바르비종파의 밀레 ‘만종’ 속의 머릿수건 쓴 아낙의 그 무명 앞에서 나는 도대체 무엇이겠는가.
나아가, 명예와 명리가 어떻게 다른 것인지 알지 못하는 나 자신이 다시 한번 낮달을 본다.
낮달! 그것은 나의 절망이다.
세계. 세계의 세(世)는 시간이다. 계(界)는 공간이다. 세계는 그러므로 시간과 공간으로 이루어졌다. 이 세계의 텅 빈 창고를 채우는 것이 사건들이다. 사건은 피할 수 없는 경우가 피할 수 있는 경우보다 많다. 그럴 바에야 그것을 정면으로 맞이할 때 그 사건의 체험이 지혜가 될 것이다. 지혜란 이미 있는 것이 아니라 앞으로 있을 것이다. 그래서 사건 뒤의 후회가 지혜이기도 하다. 하지만 끝의 지혜가 시작의 그것으로 나아가는 것이 사건의 발전이다. 사건을 비켜나지 말라. 1970년대 안병무의 신학은 민중 신학에 앞서 ‘사건의 신학’이었다. 그 뒤의 알랭 바디우의 ‘사건의 철학’이 있다. 사건이야말로 이전에 없던 진리가 생산되는 절차라 하지 않던가.
고은 시인·서울대 초빙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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