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에서 보통 ‘천만에요’라는 뜻으로 쓰이는 말이 이 상황에서 브로컨(broken) 잉글리시냐, 아니냐를 놓고 인터넷 사이트에서 뜨거운 논쟁이 벌어졌다. 심지어 노무현 대통령이 이런 영어를 했으면 “가방 끈이 짧아서”라고 비웃었을 언론이 MB는 봐준다는 말까지 나온다. “You are very welcome here(여기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라고 했으면 더 정확한 영어가 됐겠지만 ‘here’가 빠져 부자연스럽긴 해도 틀린 영어는 아니라고 교육받은 미국인들은 말한다.
대통령직인수위가 영어에 몰입하면서 ‘유 아 웰컴’ ‘굿 모닝’ 같은 인사말 영어까지 복습하게 돼 한국인의 토플 평균성적이 올라갈 것 같다. 그런데 도대체 영어는 어느 정도나 잘해야 하는 걸까.
영국 케임브리지대 장하준 교수는 ‘영어는 필요한 사람만 잘하면 된다’는 소신을 갖고 있다. 그는 케임브리지대에서 경제학석사, 박사 학위를 취득했고 영어 저술을 여러 권 펴냈다. 그런 그도 “내 영어에 한국어 악센트가 여전히 남아 있지만 부끄럽지 않다”고 고백한다.
iBT 111위 부끄러운 자화상
언어학자들에 따르면 사춘기를 전후해 모국어 악센트가 뇌의 마이크로 칩에 고착되기 때문에 원어민의 발음을 완벽하게 내려면 고등학교 때 유학을 가도 늦다. 독일 태생으로 나치의 유대인 박해를 피해 15세 때 가족이 미국으로 이주한 헨리 키신저 전 국무장관의 영어에도 독일어 악센트가 남아 있다고 한다.
장 교수는 작년 말 관훈클럽 강연에서 “평생 투자를 해도 원어민(原語民)을 못 따라가는 영어에 온 국민이 ‘몰빵’하는 전략은 비효율적이다. 영어에 투자하는 땀을 전공분야에 쏟으면 훨씬 높은 성취를 이룰 수 있다”고 말했다. 보통 사람은 전공분야를 열심히 하고, 영어가 필요할 때는 전문 통역을 쓰면 된다는 이야기다. 서바이벌 영어를 하는 데는 1000단어로도 부족함이 없다는 말이 있다. 장 교수의 말에는 영어를 완벽하게 잘하려고 하다가 좌절하지 말라는 의미도 담겨 있을 것이다.
영어를 공용어로 써야 한다는 견해도 다시 고개를 든다. 그런데 국민의 80% 이상이 영어로 대화가 가능한 네덜란드 스웨덴 덴마크에서도 영어는 공용어가 아니다. 필리핀 파키스탄과 남태평양 또는 아프리카 국가를 보더라도 영어 공용어가 반드시 고부가가치 창출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다. 인도 벵갈루루에는 미국 기업의 콜센터와 컴퓨터 소프트웨어 회사들이 분주하지만 저임(低賃)의 영어 사용 인구를 노린 아웃소싱이 대부분이다.
세계시장을 무대로 먹고사는 한국에서 영어는 서바이벌 도구가 돼가고 있다. 얼마 전 한 건설회사에서 두바이 지사 직원을 모집했다. 회장에게 인사 청탁이 끊이지 않았지만 외국인과 영어 소통이 불가능한 직원을 뽑을 수는 없었다. 구직(求職)에서부터 잉글리시 디바이드가 생기는 현실이다.
작년 토플이 인터넷 기반의 iBT로 바뀌면서 전체 147개국 중 한국은 111위로 추락했다. 영어에 사교육비 15조 원(삼성경제연구소 추정)을 쏟아 붓는 나라에서 초라한 성적이다. 대학 입시용 영어에 몰입해 해석과 문법에는 강한 데 논리적 말하기가 약한 탓이다. 세계 2위 경제대국 일본이 iBT 성적 137위인 것을 보면 영어가 속한 인도유로피언 어족(語族)과 촌수가 먼 한국어 일본어의 한계처럼 보이기도 한다.
영어스트레스 늘리는 겉절이 정책
2004년부터 영어 강의를 개설한 고려대의 경우 미국에서 학위를 마친 젊은 교수들의 강의는 별문제가 없다는 것이 학생들의 반응이다. KAIST는 서남표 총장의 의지가 강해 올해 신입생부터 100% 영어 강의를 시작한다. 중고교라고 해서 영어로 영어를 가르치는 교육(Teaching English in English)에 대해 지레 겁부터 먹을 일은 아니다.
다만 인수위의 혼선으로 교육 현장에서 영어 스트레스가 늘어나고 있다. 정권 인수를 앞두고 의욕에 넘치는 것은 좋지만 ‘영어교사 3진 아웃제’ ‘타 과목의 영어몰입식 교육’ ‘영어능력평가시험’ 같은 설익은 겉절이 정책을 불쑥 내놓았다가 거두어들이는 일은 삼갔으면 좋겠다.
황호택 수석논설위원 hthwa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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