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초대 대통령이 취임식(1948년 7월 24일)에서 읽은 선서문으로, 현행 헌법 제69조에 들어 있는 선서문과 큰 차이가 없다. ‘국헌’이 ‘헌법’으로 바뀌었고 대통령의 직무에 ‘조국의 평화통일’ ‘국민의 자유 증진’ ‘민족문화의 창달’이 추가된 정도다.
동아일보에 게재된 초대 대통령 취임식 기사에는 이 대통령이 오른손을 들고 ‘3000만 국민과 하느님’에게 대통령 취임선서의 글을 읽고 서명했다고 돼 있다. 대한민국은 기독교 국가도 아닌데 ‘하느님’은 왜 들어갔을까. 이 대통령은 취임사에서도 ‘오늘 대통령 선서 하는 이 자리에 하느님과 동포 앞에서 나의 직책을 다하기로 한층 더 결심하며 맹서합니다’라고 말했다.
개신교 신자였던 이 대통령은 식민지에서 해방돼 대한민국 건국에 이르기까지 사람의 힘만으로 된 것이 아니라 하느님이 도왔다고 생각했다. 그는 제헌국회 임시의장으로 개회를 하면서도 이런 내용의 발언을 하며 감리교 목사인 이윤영 의원에게 기도를 부탁했다. 미국 대통령들이 선서문을 읽은 뒤 “하느님, 나를 도와주소서(So help me, God)”라고 덧붙이는 관행도 참고한 듯하다. 그 뒤로 선서 대상에서 ‘하느님’은 빠졌지만 오른손을 들고 ‘마이크’를 향해 선서하는 관행은 노무현 대통령 취임식까지 그대로 내려왔다.
헌법 수호하는 대통령 돼야
미국 대통령은 헌법 2조 1절 8항에 따라 “나는 미국 대통령의 직무를 성실히 수행하며, 나의 능력의 최선을 다하여 미국 헌법을 보전하고 보호하고 수호할 것을 엄숙히 선서(또는 확약)한다”고 선언한다. 미국 대통령의 선서는 우리처럼 대통령의 직무를 일일이 열거하지 않고 ‘헌법을 지키겠다’는 말로 집약하는 것이다.
미국은 조지 워싱턴 초대 대통령 이래로 성경에 손을 얹고 선서를 하는 것이 관례로 돼 있다. 미국은 정교분리(政敎分離)의 국가지만 초기 이민자의 개신교 문화가 사회 곳곳에 배어 있다. 국가는 특정 교파를 지지할 수 없지만 교회는 국가를 지원할 수 있다. 워싱턴 대통령은 성경에 손을 얹고 선서함으로써 교회와 성직자들에게 미합중국 정부를 지원해 달라는 뜻을 표현했다고 역사가들은 해석한다.
제6대 존 퀸시 애덤스 대통령은 성경 대신에 헌법과 법률을 담은 법전에 손을 얹고 선서했다. 신앙심이 두터웠던 애덤스 대통령이 선서할 때 성경을 사용하지 않은 것은 성경이 종교적인 목적으로만 사용돼야 한다는 소신 때문이었다.
존 F 케네디 대통령이 급서한 지 1시간 반 만에 대통령직을 승계한 제36대 린든 존슨 대통령은 공군 1호기에서 가톨릭 미사경본에 손을 얹고 선서했다. 가톨릭 신자였던 전임 대통령이 사용하던 공군 1호기 안에는 아무리 찾아도 성경이 없었고, 대통령 책상에서 미사경본만 발견됐다.
이승만 대통령이 미국 대통령처럼 대법원장 앞에서 선서를 하지 않은 것은 삼권(三權) 위에 군림하는 국부적(國父的) 권위주의와도 관련이 있어 보인다. 어쨌거나 그는 재임 중 발췌 개헌, 사사오입 개헌을 통해 헌법과 헌법정신을 훼손했다.
노 대통령은 재임 중 헌법에 관한 논란을 수없이 불러일으켰다. 헌법을 준수하겠다고 선서하고 취임한 대통령이 “그놈의 헌법”이라는 막말을 했으니 길게 말할 필요도 없다.
이번엔 대통령 선서방식 바꾸길
이명박 차기 대통령은 개신교 신자이지만 헌법 20조가 종교와 정치의 분리를 선언하고 있기 때문에 성경에 손을 얹고 선서를 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애덤스 대통령처럼 성경 대신 법전에 손을 얹고 하는 선서는 가능하다. 대법원이 헌법재판소보다 의전 서열은 앞이지만 대한민국 헌법의 해석에서 최종 권한이 있는 기관은 헌법재판소다. 따라서 이 차기 대통령이 미국식 선서를 하게 되면 헌법재판소장 앞에서 하는 것이 타당하다(이 대목에서 대법원이 서운하게 생각할지 모르겠다).
이명박 대통령 취임식부터 헌법이 담긴 법전에 손을 얹고 헌재소장 앞에서 선서를 하는 관행을 만들어 가면 좋겠다. 이것은 대통령의 헌법준수 의지를 강력하게 표현하는 의식이 될 수 있다. 헌재소장 앞에서 헌법을 지키겠다고 선서한 대통령은 마음에 안 드는 헌재 결정이 나오더라도 노 대통령처럼 ‘선출되지 않은 권력’ 운운하며 비난하는 언행은 못할 것이다.
황호택 수석논설위원 hthwa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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