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호택 칼럼]정권 實勢인증 名博

  • 입력 2008년 3월 1일 03시 01분


옥스퍼드대는 영국 지도자의 산실(産室)이다. 영국에서 1721년 현대적 의미의 총리 제도가 생긴 이래 현 고든 브라운까지 52명의 총리 가운데 25명이 옥스퍼드 출신이다. 이 대학을 졸업한 외국 대통령과 총리도 20여 명이나 된다. 미국 빌 클린턴 전 대통령, 얼마 전 폭탄 테러로 숨진 파키스탄의 베나지르 부토 전 총리, 인도의 인디라 간디 전 총리, 노벨평화상 수상자인 미얀마의 아웅산 수치 여사가 이 대학 졸업생이다.

12세기에 설립된 옥스퍼드는 1470년 세계에서 처음으로 명예 학위(學位)를 수여했다. 옥스퍼드는 이 대학 출신 영국 총리에게 명예박사를 주는 전통을 갖고 있다.

마거릿 대처 전 총리는 모교에서 명예박사 학위 수여를 거부당한 최초의 총리라는 불명예를 안았다. 1985년 대학 재정 지원액을 삭감했다는 이유였다. 대처는 옥스퍼드에서 화학을 전공하고 과학장관을 거쳐 총리가 됐다. 옥스퍼드는 총리를 너무 많이 배출해 배가 불렀던 모양이다. 교직원 투표 결과 738 대 319로 반대가 압도적이었다. 대처 총리는 대변인을 통해 “그들이 그렇게 결정했다면 명예학위를 받고 싶은 생각이 없다”고 짤막한 논평을 내놓았지만 모교의 결정에 당혹스러워한 것으로 전해졌다.

옥스퍼드는 보수당 총리에게 불명예를 준 처사의 정치적 균형을 잡으려는 듯 2000년 노동당 출신 토니 블레어 총리에 대해서도 명예학위를 주지 않기로 결정했다. 그가 모교 입학제도의 엘리트주의를 비판한 것에 교직원들이 화가 나 있었다. 블레어 총리는 “명예박사를 받는 것보다는 다양한 배경을 가진 젊은이들이 옥스퍼드에 들어가는 데 더 관심이 있다”는 논평을 발표했다.

‘학문의 노동’ 없는 명예박사

미국의 명문인 매사추세츠공대(MIT), 코넬, 스탠퍼드 같은 대학은 명예박사 학위를 주지 않는 전통을 지키고 있다. MIT 설립자인 윌리엄 바턴 로저스는 명예학위 수여를 ‘학문의 적선’이라고 깎아내리며 “대학은 겉치레의 공훈과 떠들썩한 유행의 수요(需要)에 대해서는 문을 열어 주지 말아야 한다”고 말했다. MIT는 캠퍼스 안에서 세 가지를 두지 않는 것으로 유명하다. 첫째 일류 운동선수, 둘째 의학대학원, 셋째 명예학위다. 명예학위 수여자를 까다롭게 검증하는 옥스퍼드의 전통도 아름답지만, 아예 ‘학문의 노동이 따르지 않은 학위’를 주지 않는 MIT는 더 멋지다.

한국의 명예박사는 문민정부 이후 정권 교체로 새로 등장한 권력 실세(實勢)의 인증서처럼 돼 버렸다. 이명박(MB) 대통령의 측근인 이재오 의원이 모교인 중앙대에서 2월 15일 정치학 명예박사 학위를 받았다. 중앙대가 ‘민주화에 기여한 3선 의원으로 모교의 영예를 드높였다’고 한 공적사항에 이의를 제기하고 싶은 생각은 없다. 다만 이 의원과 MB의 관계를 생각해 보건대 대통령 취임식을 열흘 앞두고 이 의원에게 명예박사 학위를 준 것은 정치적 시류에 민감하다는 세평을 피하기 어렵다.

김영삼 대통령 정부 때 ‘2인자’로 통하던 최형우 씨가 1995년 1월 모교인 동국대에서 명예박사 학위를 받은 것을 비롯해 상도동계의 명박(名博) 대열이 길어졌다. 김대중 대통령 때는 권노갑 김홍일 의원 등이 명박을 받았다. 전북 원광대가 치열한 경쟁을 뚫고 로스쿨을 인가받자 작년에 노무현 대통령이 이 대학에서 명박을 받은 사실이 새삼 쑥덕공론의 대상이 됐다.

2월 23일자 본보 A6면 위크엔드 포커스 기사에 따르면 한국 대학들이 재정에 도움을 주거나 졸업생의 취업률을 높일 수 있는 기업인에게 경영학 명예박사를 수여하는 사례가 늘어나고 있다. 심지어 발전기금 10억 원과 맞바꾸다시피 하는 명박 세일도 있다.

최형우 권노갑 노무현 이재오

대학이 국내외의 명사들에게 주는 학교홍보용 명박도 흔하다. 넬슨 만델라 전 남아프리카공화국 대통령은 각국 대학에서 120여 개의 명예박사를 받은 세계 명박 기록 보유자다.

하버드대가 1996년 80대의 흑인 세탁부 오셀라 메가티 씨에게 명박을 수여한 사례는 우리 대학들에 생각할 여지를 준다. 메가티 할머니는 초등학교 6년만 마치고 70년 동안 세탁부로 일했다. 독신으로 살며 자동차를 사 본 적이 없고 어디든 걸어 다녔다. 메가티 할머니는 평생 알뜰하게 저축한 돈 15만 달러를 서던 미시시피대에 가난한 흑인학생들을 위한 장학금으로 기부했는데, 정작 하버드대가 명예박사로 모신 것이다.

황호택 수석논설위원 hthwa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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