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기의 철학, 과학 예술 사랑과 소통하라
포스트모더니즘의 등장은 수많은 ‘죽음’을 만들어 냈다. ‘인간(주체)의 죽음’ ‘이성의 종언’ ‘총체성의 종말’ 같은 해체적인 담론들이 등장한 것이다. 이는 곧 ‘철학의 죽음’으로 총칭할 수 있다.
알랭 바디우는 이에 맞서 “철학은 가능하고 필요하다”고 말한다. 그리고 엄밀한 형이상학적 사유를 강하게 밀어붙이면서 철학의 위기를 정면으로 돌파하려고 한다. 단행본으로 출판된 게 아니라 바디우의 강연과 학회 발표문을 묶은 이 책은 철학을 재구축하기 위한 바디우의 사유와 방법론을 담고 있다.
그는 철학이 자신의 고유한 장소를 잃어버렸다는 사실부터 지적한다. 철학이 고유의 사유로서 스스로를 결정짓지 못하고 역사주의적 사고와 계보학적 전통에 얽매여 있었기 때문이라는 게 그의 해석이다. 바디우는 “철학은 역사에 얽매여선 안 된다. 근본적으로 철학사를 잊어버리자”고 제안한다.
그는 철학의 갱신을 위해 우선 철학을 궤변론과 구별 짓는 과제를 수행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궤변론은 마치 쌍둥이처럼 철학과 함께 존재해 왔다. 친구이자 적과도 같은 존재다.
궤변론자들은 “진리가 없다”거나 “진리는 무용하고 불확실하다”라고 주장한다. 즉, 협약, 규칙, 담화, 언어유희만 있을 뿐이라는 것이다. 궤변론자들은 이에 따라서 “말해질 수 없는 것에 대해선 침묵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궤변론자들은 또 ‘진리의 이념’을 ‘규칙의 이념’으로 대체하려 한다. 그러나 바디우는 “말해질 수 없는 것을 말하는 것이 철학의 존재 이유”라고 강조한다.
바디우에 따르면 현대의 궤변론은 스탈린적 마르크스주의 철학인 변증법적 유물론, 민족사회주의적 투쟁의 차원에 위치한 하이데거의 사유, 논리 실증주의에서 발전한 미국의 아카데믹 철학이다.
바디우가 궤변론을 대립의 대상으로 설정한 것은 궤변론이 부정하는 진리를 일으켜 세움으로써 철학의 자리를 되찾겠다는 뜻에서다. 그러나 철학은 스스로 진리를 생산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바디우도 인식한다. 그렇기 때문에 철학은 다른 곳에서 생산된 진리들을 ‘압류’해 옴으로써 ‘진리성’을 추구해야 한다는 게 그의 생각이다.
그는 “독립된 실재 속에서 전개되는, 철학에 앞서는 진리들이 있다”고 말하고 진리를 생산하는 ‘장소’들을 분류해 제시한다. 대표적인 장소가 과학, 예술, 정치, 사랑이다. 이런 장소들은 철학을 가능하도록 하고 필요하도록 해주는 ‘조건들’이다.
철학의 행위는 여기에서 생산된 진리들을 ‘압류’해 와서 ‘사고’를 덧붙이는 일이다. 이런 작업을 통해 철학은 “진리란 있다”라고 선언할 수 있는 것이다.
이 책은 바디우의 이런 주장을 앞세우며 과학, 예술, 정치, 사랑 등 철학의 ‘조건들’에 대한 바디우의 세세한 분석을 담고 있다.
금동근 기자 gold@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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