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문 가로질러 살펴본 19세기 과학사
책 제목 ‘헤르메스’는 과학, 학예, 상업, 변론의 신이다. 유창한 말솜씨의 전령이자 안내자며 메신저를 상징한다. 소통과 관계의 대변자인 셈이다.
철학자 미셸 세르는 과학 철학 문학 등 학문 사이를 가로지르는 소통을 평생 과제로 생각했다. 1999년 국내에 번역된 이 책은 ‘소통’ ‘간섭’ ‘번역’ ‘분포’ ‘서북통행로’로 이어지는 ‘헤르메스’ 5부작 중 4권이다. 1977년 나온 이 책은 19세기 과학사를 정리했다. 여러 과학 분야를 가로지르며 탐색하는 세르의 진면목을 엿볼 수 있다.
세르에 따르면 오늘날 학문은 과학이 철학 문학 역사와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지 무관심하다. 예컨대 유럽의 고전주의 시대에 응용과학이 출현한 배경이 중상주의 경제의 영향이라는 것을 입증한 연구가 없다.
이처럼 개별 학문은 완벽히 분할돼 있다는 게 세르의 지적이다. 역사가와 철학자가 과학을 알지 못하며 과학자가 역사나 철학을 알지 못한다. 세르는 그 결과 기하학 대수학 수학 광학 열역학 박물학 등 개별 과학의 역사만 있을 뿐 이를 가로지르는 과학사는 없다고 말한다.
세르의 지적을 들어보자. “기하학과 광학은 서로 독립적으로 존재하고 닫힌 체계로 발전하는 것처럼 보인다. 기하학이 기하학 자체로부터, 광학이 광학 자체로부터 생겨난 것처럼 보인다.” 결국 이런 관념에 의해 학문의 방법과 결과가 미리 결정되고, 그런 생각에 따라 학문 체계가 세분화된 것이다.
세르는 이처럼 구분되고 안정된 체계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서로 언제 어디서 만날지 모르는 ‘무질서한 세계’만 존재한다는 것이다. 그는 서문에서 이를 구름과 대기에 비유한다. 대기 위 구름은 떠돈다. 동쪽에서 떠서 서쪽으로 지는 태양과 달리 정해진 규칙이 없다. 구름이 어디로 흘러갈지 아무도 모른다. 세르에 따르면 대기는 학문들의 세계고 학문들은 ‘무정형의 아득하게 넓은 대양 위에 흩어진 군도’에 비유될 수 있다. 구름은 아무렇게 흩어진 학문들 사이를 떠돌며 학문들을 매개한다. 세르의 방법론은 구름에 비유된다.
이 책의 부제가 ‘분포’인 것도 과학이 정연하고 독립된 체계가 아니라, 서로 떠다니며 언제 어디서 만날지 모르는 학문들의 분포라는 의미를 담았다.
세르는 이런 19세기 과학사를 여행한다. 데카르트, 뉴턴, 칸트, 니체, 다윈, 마르크스, 베르그송, 프로이트…. 수학 물리학 역학 철학 문학 신학을 넘나든다. 과학사를 얘기하면서 문학과 신화를 얘기한다. 그렇다고 지식 분야를 아무렇게나 연결하지 않는다. 학문과 학문 사이에 밀접하게 연관된 지점을 탐색하고 관계성을 복원한다. 역자의 표현대로 “여러 학문 영역들로 찢긴 백과지식의 공간을 깁는다”. ‘지식의 음유시인’이라 불릴 만큼 시적이고 은유적인 문체가 인상적이다.
윤완준 기자 zeitu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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