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 만물, 차이는 있어도 우열은 없다
솔직히 얘기하자. 들뢰즈는 어렵다. 고등수학책을 보는 것만큼 난해하다. 하물며 철학적 주요 개념을 푸는 바탕엔 미분법이나 리만 기하학 같은 수학 이론까지 깔려 있다. 이만하면 철학과 수학의 궁극이라 할 만하다.
그런데 이상하다. 들뢰즈는 인기 있다. 1990년대 국내에 포스트모더니즘이란 광풍이 지나간 뒤에도 살아남았다. 철학뿐 아니라 사회현상 설명에도 심심치 않게 등장한다. 1995년 투신자살 이후에도 영향력은 더욱 확대, 재생산되고 있다.
미셸 푸코가 선언한 ‘들뢰즈 세기(世紀)’의 도래. 많은 이는 그 원인을 들뢰즈 철학의 ‘실천성’에서 찾는다. 고전적 이성중심주의를 비판하고 지식과 사회에 만연한 차별의식의 타파, 문학과 과학을 넘나드는 고민을 통해 존재와 비존재라는 발상 자체를 해체한다. 그 정점이자 출발이 ‘차이와 반복’이다.
원래 이 책은 1968년 저자의 국가박사 학위 청구 논문이었다. 그러나 그 한 편의 박사 논문은 당대 식자들이 “비바람을 동반한 폭풍우”라 부를 만큼 충격이었다. 들뢰즈가 동시대 급진적 사유를 받아들여 기존 철학사 전체를 자기 식으로 재편하고 철학적 변형을 꾀했기 때문이다. 이는 그리스 시대 이후 줄곧 서양철학의 근본이었던 ‘자기 동일적인 존재’, 즉 이데아라는 발상 자체를 재정립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다시 말해 ‘차이와 반복’에서 구축하는 존재론은 플라톤의 ‘이데아’ 이래 지속된 이원적 세계관과 인식 자체가 다르다. 들뢰즈는 이념 세계도 감성 세계 속에 놓는다. 개념적 세계마저 감성 차원에 속한다. 감성적이건 물질적이건 경계선은 존재할지언정 하나의 전체 안에 존재하는 셈이다.
때문에 모든 사물과 인식은 이미 존재할 때부터 이데아로서 이상적 요소를 머금고 있다. 즉 체계에 따라 충돌이 발생할 순 있어도 우열 자체를 따질 순 없다. 따라서 세상의 모든 것은 ‘차이’와 ‘반복’의 재생이 있을 뿐 절대와 등급은 존재하지 않는다.
들뢰즈 철학이 힘을 얻는 지점도 여기에 있다. 기존 서양철학은 감각이 인식하는 사물을 이데아(원형)의 복제로 인식했다. 이는 사물이 얼마나 원형에 가까운가에 따라 좋고 나쁨으로 판단할 수 있다는 뜻이다. 이로 인해 이원적 인식론은 현실세계에서 남녀, 인종 차별 같은 우열이 존재한다는 발상의 근거가 되기도 했다. 하지만 ‘차이와 반복’은 이데아의 실체를 절대시하지 않는다. 모든 것은 같은 테두리 안에 존재한다. 단지 차이와 다양성이 있을 뿐이다.
게다가 저자는 이를 위해선 과학 특히 에너지와 생명을 다루는 자연과학의 습득을 중시한다. 사실 ‘차이’라는 개념 자체도 수학의 미분법에서 도출해낸 것이다. 학제 간 영역을 넘어서는 통섭의 시대에 ‘차이와 반복’이 새롭게 읽히는 이유다.
정양환 기자 ra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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