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에는 용의자를 잡아놓고 고문하거나 잠을 안 재우는 방식으로 수사를 했다. 그러나 인권의식의 발달과 함께 증거 위주 재판과 수사과정의 적법성이 강조되면서 고문 수사는 설 땅을 잃었다. 요즘엔 현장을 누비는 수사관 외에 유전공학, 법의학, 심리학, 범죄학, 첨단 컴퓨터 기술 등 온갖 분야의 전문가들이 동원된다. 그럼에도 고도로 지능적인 범죄나, 사회통념과 상식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무동기(無動機) 또는 이상동기 범죄는 과학수사 기법으로도 해결하기 어려운 경우가 많다.
▷안양 어린이 유괴 살해범 정모(39) 씨의 범행 동기와 여죄를 밝히는 데 프로파일러들이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고 한다. 알리바이가 거짓으로 드러나고 렌터카 트렁크에서 실종된 어린이들의 혈흔이 발견된 뒤에도 정 씨는 진술을 번복하고 오락가락했다. 프로파일러들은 정 씨가 성적(性的)인 범행 동기를 숨기고 있다는 점에 주목했다. 이들은 정 씨가 부모의 이혼 후 혼자서 외롭게 살아온 과정을 털어놓도록 유도해 마음의 문을 열게 했고 결국 자백을 받아냈다. 과학수사의 개가였다.
▷경찰이 정 씨의 범죄를 밝혀낸 것은 다행이지만 초기에 현장 주변 탐문 같은 기초적인 수사에 실패함으로써 범인 검거가 늦어진 점은 깊이 반성해야 한다. 정 씨의 2년 전 성추행 범죄 피해자 신고를 소홀하게 수사했고 정 씨의 알리바이에 대한 초기 수사도 형식적이었다. 경찰은 이번 사건을 과학수사 기법이 아무리 발달해도 현장 중심의 수사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일깨워준 교훈으로 삼아야 한다.
권순택 논설위원 maypol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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