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이병기]적벽대전과 서브프라임 사태

  • 입력 2008년 3월 25일 03시 00분


금융 위기의 파급 과정에 대한 비유로 삼국지의 절정인 적벽대전(208년)을 드는 전문가가 많다. 나관중의 소설 ‘삼국지연의’에서 불타는 위나라 군선(軍船)에 대한 묘사는 금융 위기가 전염되는 과정을 직관적으로 설명해주는 힘이 있다.

유비와 손권의 연합군과 장강을 사이에 두고 대치한 조조의 군선들은 서로 쇠사슬로 연결해서 정박해 있었다. 이 약점을 간파한 오나라의 황개(黃蓋)는 위장 투항해 조조군의 선단에 불을 붙이는 ‘화공(火攻)’으로 대승을 거둔다. 북방에서 내려와 물에서 싸운 경험이 없는 조조군이 군선의 연결이 가져올 위험을 몰랐던 것이 패착이었다.

15일자 파이낸셜타임스(FT) 기사에서도 연결을 강조한 대목이 있어 흥미롭다. 미국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 관계자는 FRB가 투자은행인 베어스턴스가 파산하지 않도록 개입한 이유를 “베어스턴스의 규모가 너무 커서(too big to fail)가 아니라 다른 금융기관과 너무 연결(too interconnected)돼 있어서”라고 설명했다.

최근 베스트셀러에 오른 ‘연결(Connected)’이라는 책을 언급하지 않아도 연결이란 단어가 요즘처럼 화두(話頭)로 다가온 적이 없다.

지난해 8월 미국 서브프라임 모기지(비우량 주택담보대출) 사태가 불거진 이후 한국의 경제 사정보다 미국 금융시장의 움직임을 시시각각 따라가지 않고서는 주식이나 환율을 예측하기 어렵게 됐다. 금융시장의 연결 때문이다.

미국의 경기침체로 수요가 줄어든 원자재 값이 폭등하는 이례적인 현상은 상품, 금융, 통화 시장이 서로 연결돼 달러 약세와 인플레이션에 대한 방어로 손쉽게 상품시장에 대한 투자가 가능해졌기 때문이다.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가 주는 교훈 중 하나는 ‘연결의 양면성’이다. 사람, 돈, 상품이 국경 없이 오가는 세계화는 축복이기도 하지만 재앙이 될 수 있다.

‘연결’을 연구하는 복잡계라는 학문이 있다. 국내에 복잡계 이론을 소개한 삼성경제연구소 윤영수 연구원은 “수많은 점으로 연결된 네트워크가 커질수록 예측하기 어려운 현상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난다”고 설명한다.

특히 긴밀히 연결된 네트워크에서는 작은 사건이 증폭돼 순식간에 네트워크 전체를 파국으로 몰고 갈 수 있다. 금융시장이 대표적이다.

최근 복잡계 연구는 ‘미래의 예측은 불가능에 가깝고 사후 대처로는 위험관리가 이미 늦다’는 인식에까지 도달했다. 아무리 준비하고 노력해도 통제할 수 없는 위험이 많다는 것이다.

한국의 금융회사나 투자자들의 행태를 보면 이런 흐름을 전혀 모른다는 느낌이 든다.

잠깐 동안의 수익률 상승에 도취해 중국 인도 등 해외펀드에 앞뒤 가리지 않고 투자했다가 수십조 원의 평가손을 본 자산운용사들, 파생상품에 대한 이해도 없이 미국의 서브프라임 모기지 관련 채권에 투자해 수천억 원을 날린 금융기관들, 부동산 거품에 편승해 미국의 고급주택을 사들였다가 낭패를 본 상류층 인사들…. 금융 세계화의 ‘단맛’을 조금 맛보기 시작한 상태가 백지 상태의 무지(無知)보다 훨씬 위험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사례들이다.

조조는 적벽대전에서 패배했지만 결국 재기했다. 하지만 연결의 양면성도 모르고 21세기의 적벽대전에 임하는 사람은 재기가 불가능한 파국을 맞을 수 있다.

이병기 경제부 차장 ey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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