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광장/전상인]잠을 잊은 대한민국

  • 입력 2008년 3월 26일 02시 50분


얼마 전 서울시의회가 학원의 심야 교습을 허용하는 조례를 통과시켰다가 반대 여론에 밀려 백지화한 일은 그냥 일회성 해프닝으로 넘어갈 사안이 아니다. 차제에 그것은 우리 시대의 삶과 문화를 보다 근본적으로 재성찰하는 계기로 되새길 가치가 있다. ‘야간의 실종’을 재촉하는 잰걸음에 최근 가일층 박차가 가해지고 있기 때문이다.

가령 올해만 해도 그렇다. 경기 안산시는 전국 최초로 24시간 운영하는 주민센터를 열었다. 충북 단양군은 도담 삼봉 등지에 조명장치를 설치해 ‘야경 8경’을 조성할 계획이다. 서울시도 옛 성곽 주변 조명공사를 올해 말까지 마칠 예정이라 한다. 게다가 이명박 정부 출범 이후 관가를 중심으로 한국의 밤이 크게 짧아졌다는 소식이다.

주야 구분이 사라지는 세계적 추세를 영국의 미래학자 레온 크라이츠먼은 ‘24시간 사회’라 불렀다. 이는 결코 편의점이나 패스트푸드점의 심야영업 정도를 두고 하는 말이 아니다. 24시간 사회는 극장, 백화점, 주유소, 헬스클럽, 이발소, 세탁소 등에서 의료, 금융, 운송 부문으로 확산된 여세를 몰아 목하 공공영역까지 넘보는 추세다. 통째 ‘24시간 도시’를 만드는 곳도 늘어나고 있는데, 업무와 쇼핑 및 문화레저 활동의 전일화(全日化)를 통해 도시의 재생과 성장을 모색하려는 도시계획의 일환이다.

바쁜 일상이 ‘24시간 사회’ 낳아

24시간 사회의 출현은 산업혁명 시대에 예고됐지만 요 근래 10여 년 사이 한층 가속화되고 있다. 세계화 이후 지구 전체가 단일시장으로 통합되고 정보혁명이 공간과 시차를 쉽게 뛰어넘기 때문이다. 덩달아 현대인의 일상도 더욱 바빠져, 예컨대 하루 8시간 활동만으로 만족할 만한 생활을 할 수 있는 경우란 거의 없게 됐다. 옥스퍼드대 출판부에 따르면 오늘날 영어에서 가장 많이 쓰이는 단어가 바로 시간(time)이다. 일은 많고 틈은 없는 상황에서 결국 밤의 경제가 새로운 프런티어로 각광받는 것이다.

이와 같은 흐름 속에 특히 눈에 띄는 곳이 우리나라다. 2005년 여성가족부 조사에 따르면 한국의 성인들은 선진국에 비해 두 시간 더 일하고 50분 정도 덜 자는 것으로 나타났다. 조사전문회사 AC닐슨은 언젠가 ‘밤잠을 잘 자지 않는 국가 순위’를 발표한 적이 있는데, 평균 6시간의 한국과 대만이 공동 2위였다. 1위인 포르투갈에 낮잠 문화가 있다는 점을 감안하면 사실상 으뜸이었다. 지금 우리는 온 나라가 불야성이고 전 국민이 올빼미인 ‘잠 못 이루는 대한민국(Sleepless in Korea)’에 살고 있는 것이다.

24시간 사회는 공간 활용의 효율성 증대, 러시아워의 분산, 시간의 자율적 관리라는 나름의 장점을 내세운다. 공공기관이나 편의시설을 이용하기 위해 사람들이 특정 시간대에 몰리지 않고 각자 편한 때를 선택할 수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궁극적으로 그것이 개인의 자유와 인간의 행복에 어떤 의미를 갖는지는 의문이다. 한밤중에 노래방이나 할인점을 찾을 수 있고 오밤중에 파마나 등산을 할 수 있을 정도로 딴에는 좋아지고 편해진 세상의 이면에 행여 자본의 역학과 시장의 논리가 감추어져 있지 않은지 따져볼 문제다.

석기시대 인간들은 일주일 15시간 노동으로 충분했다고 한다. 이에 비해 바깥일이든 집안일이든 하루에 15시간 이상 일해야만 하는 것이 요새 사람들이다. 특히 압축적 근대화를 자랑삼아 이른바 ‘다이내믹 코리아’를 자부하는 우리나라는 불면을 자청하는 24시간 사회를 일종의 발전이나 선진화로 치부하는 눈치다. 그렇지 않고서야 나이 어린 청소년들의 밤잠을 뺏겠다는, 혹은 외진 숲과 계곡에서 월광과 별빛을 내쫓겠다는 관(官) 주도 발상이 도대체 가능이나 하겠는가.

정신 망각한 생산성은 反문명

현대문명을 무조건 배척하려는 주장이 아니다. 하지만 최소한 24시간 사회로의 맹목적 진화에 마냥 동조하고 투항할 수만은 없다. 편의와 생산성을 앞세운 채 인간지존의 정신을 망각하고 자연과의 평화공존을 외면하는 현실은 이제 문명이기 어렵다. 산업사회로 치닫던 1930년대 영국사회를 안타깝게 지켜보며 문명에 필수적인 것은 일과 노동이 아니라 여가와 여유라 했던 철학자 버트런드 러셀은 과연 옳았다.

전상인 객원논설위원·서울대 교수·사회학 sangin@sn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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