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번도 언론과 떨어진 적 없어
오헌 선생은 파란만장한 한국언론 현장 한가운데에서 온몸을 불사른 외길 언론인이었다. 건국 60주년을 맞은 우리 민족과 대한민국이 걸어온 발자취가 그러했듯이 그의 언론인으로서의 정력적인 생애 역시 질풍노도 속의 60년간이었다. 그는 광복정국의 혼란기였던 1947년 대학 선배인 장덕수 선생의 주선으로 동아일보에 입사한 이래 세상을 뜰 때까지 한시도 언론에서 떨어져 본 일이 없는 평생 언론인의 생애를 살아왔다.
오헌 선생은 이미 30대 초반의 기자 시절에 경제논객으로 명성을 얻어 1949년부터 그가 속한 동아일보 이외에 ‘신천지’ ‘민성’ ‘자유세계’ 등 외부 월간지에 한 달에도 몇 편씩 많은 논설을 기고했다. 그는 자유당 정권 말기에는 ‘사상계’ 등에 신랄한 정치평론도 썼으며 정력적인 문필 활동은 1983년 동아일보사 회장직을 물러난 뒤 2000년대에 이르기까지 중단 없이 계속됐다.
오헌 선생의 문필 활동 중 가장 빛나는 업적은 1997년의 외환위기 발생 무려 7개월 전인 그해 4월 17일자 문화일보에 기고한 ‘외환외기의 실체를 보자’라는 명논설이었다. 그는 이 글에서 “지금 우리 경제가 겪고 있는 외환위기가 앞으로 멕시코 경제가 1994년에 경험했던 파국과 같은 것을 재현하지나 않을까 걱정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것이다. 그런데도 일부 관변 측 식자들 가운데선 한국의 외환위기를 멕시코의 그것과 같게 인식하는 것은 잘못이라고 하는 견해도 있는 것은 이해할 수가 없는 일이다”라고 경고했다.
오헌 선생은 광복 직후 좌익사상이 유행이던 시절에도 흔들림 없는 시장경제 옹호론자였다. 그는 1960년대 말 동아일보 안에 통일문제연구소를 설치하고 안보통일문제의 연구를 시작하도록 했고 개인적으로는 1971년부터 별세하기까지 고 강원용 목사, 김점곤 장군과 함께 ‘평화토론회’라는 외교안보문제 포럼의 공동대표로 일했다.
돌이켜보면, 오헌 선생은 그동안 언론인으로서 한결같이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를 옹호하고 개방을 주창해왔다. 그는 이 같은 일관된 입장으로 대한민국의 건국, 산업화, 민주화, 세계화로 발전하는 과정에서 올바른 방향 제시를 통해 국가 발전에 공헌했다. 오헌 선생은 90을 넘긴 고령에도 불구하고 최근까지 후배 언론인들과의 교유를 즐겨해 언론사를 가리지 않고 칼럼니스트들과 만나 시국을 토론하는 열정을 과시했다.
오헌 선생의 언론인으로서의 생애에는 영광만이 아니라 많은 어려움과 아픔도 있었다. 첫 고난은 6·25전쟁과 함께 시작되었다. 황해도 봉산 출신인 그는 김일성 치하를 피해 1947년 서울로 내려와 언론계에 입문했으나 6·25전쟁이 일어나 인민군이 서울에 입성했을 때 미처 피란하지 못하고 그들에게 납치돼 끌려갔다. 그는 함경북도 개천까지 끌려갔다가 국군에게 구출돼 구사일생으로 돌아오는 데 성공했다. 당시 200여 명의 언론인이 북으로 끌려갔는데 동아일보 소속만 17명에 이르러 가장 피해가 컸다.
언론인으로서 그가 역경에 처한 또 다른 사건은 1971년 12월 박정희 정부가 유신의 앞 단계인 국가비상사태를 선언했을 때였다. 당시 그는 대만 시찰에서 그곳의 경제가 발전하고 사회가 안정된 모습에 깊은 인상을 받고 귀국한 직후였다.
거침없던 권력비판 눈에 선해
필자는 그때 그가 소장으로 있던 통일문제연구소의 간사일도 맡고 있던 때여서 김포공항에 마중나갔다. 그는 바로 집으로 돌아갈 생각을 않고 공항 커피점에 가자고 하더니 대만과 한국을 비교하면서 울분을 토하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오헌 선생은 정부가 국가비상사태의 정당성을 홍보하는 설명회에서도 정면으로 고위 당국자를 비판해 정부의 미움을 사 결국 신문사를 떠나지 않을 수 없었다.
이제 그는 영광과 간난의 60년 언론인 생활을 마감하고 홀연히 세상을 떠났다. 삼가 오헌 선생의 명복을 빌고자 한다.
남시욱 언론인 세종대 석좌교수
※故이동욱 선생 영결식: 오늘 오전 8시 고려대 안암병원 장례식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