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안사 서빙고 분실은 중앙정보부 남산 지하실, 경찰 남영동 대공분실과 함께 1972년 ‘10월 유신’ 이후 야당 정치인과 재야인사, 운동권 대학생들에 대한 불법 연행과 고문으로 악명을 떨쳤다. 보안사는 윤 이병의 폭로를 계기로 1991년 1월 국군기무사령부로 간판을 바꿔달고 정치적 사찰 중지를 선언한다. 그러나 1992년 이지문 중위가 기무사의 총선 개입 사실을 폭로해 다시 홍역을 치른다. 1979년 12·12쿠데타를 일으켜 중앙정보부를 제압한 보안사는 전두환, 노태우 두 사령관이 차례로 대통령이 되면서 정치군인의 본산이 되기도 했다.
▷1948년 5월 육군정보국 정보처 내 대공업무 전담기구인 ‘특별조사과’가 모체인 군수사정보기관은 1950년대 특무부대와 1960년대 방첩부대를 거쳐 1968년 1·21 청와대 습격사건 이후 육해공군 보안사 체제로 확대됐다. 이후 1977년 10월 주한미군 철수를 계기로 국군보안사로 통합된다. 군사기밀 보안, 방첩, 군 관련 비리 및 형법상 내란·외환죄 수사 등이 핵심 임무인 데도 정치 개입과 민간인 사찰, 고문을 일삼던 보안사(기무사)는 1993년 문민정부가 탄생하면서 겨우 제자리를 찾는다.
▷기무사 관계자는 그제 “간첩 몇 명이 나라를 망하게 할 수도 있다”면서 방첩 분야를 강화하겠다고 말했다. 기무사는 건국 이래 붙잡힌 간첩 4500여 명 가운데 43%를 검거했을 정도로 간첩 색출에 기여했으나 김대중, 노무현 정권의 대북 햇볕·포용정책 아래선 거의 실적이 없어 간첩 검거는 기무사 임무가 아닌 줄로 아는 국민도 많다. 앞으로 사령관의 대통령 대면(對面) 보고도 부활된다고 하니 기무사가 본연의 업무에 충실한 안보의 보루로 거듭나길 기대한다.
권순택 논설위원 maypole@donga.com
구독
구독
구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