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영화에서 신사협정은 당시 당연시돼 있던 반유대인 정서를 뜻한다. 신사협정이라 하면 신의를 지키는 측면만을 생각하기 쉽지만 이 영화에서처럼 공개하기 부끄러운 밀약(密約)을 가리키는 경우도 있다. 이때 그 표현은 남성들에게 오히려 불명예가 된다. 문화체육관광부 산하 국립국어원이 ‘숙녀협정’은 없다는 이유를 내세워 이를 남성 우월적 표현으로 지목하고 ‘명예협정’이라는 대안을 제시했다. 이런 식으로 항간에 자주 쓰이는 표현 5087개를 문제 삼았다.
▷일리 있는 지적도 많다. 그러나 상당수는 너무 작위적(作爲的)이라는 인상을 준다. ‘앳된’ ‘앙칼진’ ‘야들야들한’ ‘가녀린’ 등이 왜 성(性)차별적 표현인지 근거가 약하다. ‘1남 2녀’ ‘장인 장모’ 등은 남녀 우열보다는 병렬적 표현이라 할 수 있다. 앞뒤를 바꿔 써도 무방할 것이다. 요즘 많은 사람이 ‘아빠 엄마’보다 ‘엄마 아빠’로 부르는 것도 참고할 만하다. ‘부모’를 ‘모부’로 바꾸자는 말은 왜 없을까. ‘동거녀’ ‘내연녀’는 ‘동거남’ ‘내연남’과 함께 쓰는 말인데도 성차별의 탈을 씌웠다. ‘집사람’이 문제라면 ‘바깥사람’도 문제여야 한다.
▷말은 생성된 시대상황을 반영하는 역사적 문화적 소산이다. 오늘의 관념, 잣대로만 재단해서는 말뜻을 정확하게 이해하기 어렵다. 표현의 빈곤을 낳을 수도 있다. 언론의 잘못된 표현을 연구하는 것은 좋으나 성 대결로 몰아가는 듯한 인상을 줘서는 곤란하다. 영어에서 빌려온 ‘처녀작’ ‘처녀비행’까지 문제 삼는다면 외국어도 우리가 고쳐줘야 할 판이다. 국립국어원의 제안대로 했다가는 아름답고 감칠맛 나는 표현을 상당수 잃어버릴 것 같다.
육정수 논설위원 sooya@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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