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광장/박원암]한국은행 백기사가 필요하다

  • 입력 2008년 5월 5일 02시 59분


봄이 왔으나 봄 같지 않다(春來不似春). 스산한 겨울바람 속에서 미국의 서브프라임 모기지(비우량 주택담보대출) 사태와 유가, 원자재 가격 급등 소식을 들으면서 올봄을 편히 보낼 수 없을 거라는 생각을 했지만 경제 사정이 예상보다 빨리 나빠지고 있다. 연초만 하더라도 정부가 6% 성장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무리하게 경기를 부양하면서 물가가 불안해지지나 않을까 하는 걱정들이 많았는데, 요즘은 물가와 경기가 모두 나빠지고 있다. 올 1분기 성장이 전기 대비로 3년여 만에 최저치를 기록한 가운데, 4월 물가상승률은 3년 8개월 만에 최고치를 기록했다고 한다.

이렇게 저성장 속에 물가가 오르고 있으니 성장과 물가 중 어느 쪽부터 다스려야 하는지 요즘 날씨만큼이나 뜨거운 논쟁이 벌어지고 있다. 추경과 감세 논쟁에 이어 이번 주에는 금융통화위원회 개최를 앞두고 금리 논쟁도 뜨거워질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저성장과 고물가의 위험이 모두 도사리고 있는 현 경제국면에서 이번 주 금리가 조정되더라도 소폭에 그칠 공산이 크고, 금리의 소폭 조정만으로 현 경제국면이 나아질 것으로 기대하기 어렵다.

고물가-저성장 통화로 풀기 한계

금리조정의 효과도 예전 같지 않다. 그동안 우리 경제의 개방과 글로벌화로 통화정책의 독립적 수행이 어려워지고 금리정책의 효과가 약화됐다. 예를 들면, 2007년 하반기 들어 유동성 증가세가 크게 확대되자 한국은행은 물가와 부동산시장 안정을 위하여 7월과 8월에 걸쳐서 콜금리를 0.5%포인트나 인상했다. 그러나 이후 정책당국의 기대와는 달리 유동성 증가세는 계속 확대되고 물가상승률도 높아졌다. 미국이 서브프라임 모기지 부실로 금리를 인하하고 유가 및 원자재 가격이 상승했기 때문이다.

환율 변화도 금리정책의 효과를 약화시키고 있다. 미국이 금리를 인하하는 가운데 우리나라는 유럽, 일본 및 다른 많은 나라와 마찬가지로 금리를 동결했다. 이러한 조치로 많은 나라에서는 달러화 약세가 자국 통화의 강세로 이어지면서 물가를 안정시키는 힘이 됐다. 그러나 우리나라에서는 경상수지 적자 반전 등으로 원화가 ‘나 홀로 약세’를 보이면서 금리동결의 물가안정 효과가 약화됐다.

게다가 소비자물가 상승률이 연 4%를 넘어가면서 한국은행의 물가안정 목표 달성이 어려워지고 있다. 지금까지는 중국이 싼 값으로 물건을 공급하고 원화도 절상되어 물가안정 목표 달성이 어렵지 않았으나 대외여건이 급변하면서 목표 달성이 위협받고 있다. 사정이 이러하다면 한국은행에 너무 많은 짐을 지게 할 수 없다. 한국은행이 중기적으로 물가안정 목표를 달성하지 못함으로써 국민으로부터 신뢰를 받지 못할 때 심각한 부작용이 나타날 것이므로 한국은행의 무거운 짐을 덜어줄 백기사가 필요하다.

하얀 말을 타고 나타날 동화 속의 기사는 과연 누구일까? “언제 어디서나 인플레는 통화적 현상”이므로 통화긴축을 해서라도 물가를 안정시키기를 염원하는 ‘인플레 매파’들일까? 이들은 전통적으로 한국은행의 백기사 역할을 해왔으나 잠재성장률 정도의 경제성장이 위협 받는 현 상황에서는 맞지 않다. 저성장 고물가의 딜레마 속에서 한국은행의 백기사는 물가불안을 최소화하면서 경제를 안정시키기를 염원하는 ‘인플레 비둘기파’여야 하고, 바로 기획재정부가 돼야 한다.

정부가 감세나 추경을 통해 경기부양을 하든 한국은행이 금리를 내려 경기부양을 하든 마찬가지가 아니냐고 반문할지 모른다. 그러나 금리를 내리면 환율상승을 부추겨 가뜩이나 불안한 물가를 자극하고, 지나친 환율상승으로 내수가 위축되고 일자리에도 나쁜 영향을 미친다. 또한 재정 확대의 경기부양 효과가 금리정책에 비해 빠르게 나타난다.

정부 ‘인플레 비둘기파’ 나서야

19년 동안 미국 연방준비제도이사회 의장을 지내다가 2년 전 은퇴한 앨런 그린스펀은 ‘격동의 시대’라는 회고록을 출간했다. 이 책에서 그는 ‘대립을 위한 대립’을 싫어하고 쉽게 서로를 이해할 수 있었던 미국 재무장관들과의 얘기를 재미있게 그려내고 있다. 앨런 그린스펀과 재무장관 중 누가 백기사였는지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재정정책과 통화정책의 효율적 운용으로 저성장과 고물가의 딜레마를 극복하는 것이 중요하다.

박원암 홍익대 교수·경제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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