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순덕 칼럼]富者내각의 원죄

  • 입력 2008년 5월 8일 20시 44분


일만 잘하면 된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사람 쓰는 데 재산은 아예 고려의 대상이 아니었을 수 있다. 능력만 있다면야 과거에 검은 고양이였든 흰 고양이였든 무슨 상관이냐 했을 것 같다. 그래서 ‘실용’정부였다.

부자만을 위한 정책인가

사람 심리는 그게 아니다. 내각과 청와대에 부자가 많더라는 인식이 일단 뇌에 입력되면, 아무리 꼭 그렇진 않다는 사실을 들이대도 소용없다. 심리학으로 말하면 ‘확증적 편견’이다. 여기에 하나를 보면 열을 안다는 ‘적은 수의 법칙’까지 더해지면, 부자 내각이 내놓는 어떤 정책도 부자들만을 위한 음모쯤으로 각인될 가능성이 적지 않다. 마음의 힘은 실용보다 강력하다. 무의식적으로 뒤틀리니 통제도 불가능하다.

출범 석 달도 안 된 이명박 정부가 국민과 부딪치게 된 데는 부자 내각이라는 원죄가 작용했다고 본다. 그것도 부모 재산을 받았거나 땅을 샀는데 운도 좋게 땅값이 올라 어쩔 수 없이 부자가 됐다고들 했다.

부자에 대한 국민인식도 이런 현실을 반영한다. 최근 리서치앤리서치 조사를 보면 77.2%가 “부자는 부모 재산을 물려받아 된 사람”이라고 했다. “노력보다는 운 덕분”이라는 응답은 열 명 중 여섯이나 됐다. 세계가치조사에서 응답자의 30%만이 부자는 운이라고 답한 미국이나, 54%가 동의하는 유럽보다 많은 수치다.

본인의 노력이나 능력 때문이 아닌 부는 존경받기 힘들다. 부모 잘 만나거나 운이 좋아야 부자 되는 사회라면 사람들은 그 부를 갈라 먹는 게 정의라고 믿는다고 미국 프린스턴대 롤랑 베나부 교수는 지적했다. 과거 그리고 더러는 현재도 왕국인 유럽에서 분배를 강조한 사회모델이 승한 것도 이 때문이다. 왕국도 아닌 나라의 귀족 같은 부자 내각이 국민한테는 노력과 능력, 경쟁력을 숨 가쁘게 강조해대니 감정이 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아무리 내키지 않아도 인정할 점이 있다. 이 정부가 추구하는 ‘작은 정부 큰 시장’은 부자만을 위한 정책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되레 그 반대다.

일본의 ‘효율과 평등의 교환 조건’을 연구한 2006년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의 보고에 따르면 지난 몇 년간 노동시장 유연화 등 규제개혁, 민영화, 사회보험개혁의 결과 노인층을 제외한 빈부격차는 오히려 줄어든 것으로 나타났다. 세계은행 연구소도 농업 보호, 산업 보호, 정규노동자 보호 등 과잉보호 정책은 분명 부자들을 위한 정책이라고 지적했다.

자본주의 시작부터 경제학자를 제외한 거의 모든 지식인이 시장에 회의적이었지만, 그래도 돈 없고 ‘빽 없는’ 소외계층에게는 자신의 노력과 능력으로 계층 상승이 가능한 시장경제가 훨씬 인간적이다.

지금은 이 정부가 과거 정부의 반(反)시장적 유산을 떨치고 이제 막 세계와 함께 일어서려는 순간이다. 이때 민심을 잃는다는 건 돌이킬 수 없는 자해나 다름없다. 지난주 뉴스위크는 미국 아닌 다른 세계가 세계화의 물결을 타고 일어서고 있다는 ‘나머지 세계의 부상(The Rise of the Rest)’을 소개했다. 부자 내각에 대한 반감에 자칫 우리만 ‘일어서는 세계의 떨거지(The Rest of the Rise)’가 될까 두렵다.

인사는 그래서 중요하다. 청와대는 쇠고기문제의 정치사회적 측면을 고려하지 못했다며 뒤늦게 아쉬워했지만 인사 역시 정치사회적 측면을 고려해야 한다. 암만 좋은 정책이라도 그것을 펴는 사람이 존경받지 못하면 외면당할 수 있다. 비이성적인 국민감정이라 해도 할 수 없다. 그래서 사람이다.

대통령이 져야 한다

문제는 대통령도 사람이라는 점이다. 남에 대한 배려가 탁월했던 사람도 권력을 잡으면 남의 입장에서 보는 능력이 즉각 사라진다는 연구가 있다. 일부 내각과 참모의 무능력이 드러났는데도 대통령이 “사람을 바꿀 필요 없다”고 일축한 것도 이런 심리적 변혁 때문인지 의문이다.

사랑엔 미안하다는 말이 필요 없다지만 정치에선 아니다. 대통령이 실수를 인정하고 인사와 국정을 쇄신하고 국민에게 사과도 해야 상처 입은 마음이 풀릴 수 있다. 잘못을 바로잡고 새로 시작하기에 늦은 때는 없는 것처럼 너무 이른 때도 없는 법이다.

김순덕 편집국 부국장 yur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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