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익숙한 것들’과 결별해야
이 대통령은 엊그제 국가조찬기도회에서 “내가 먼저 바뀌겠다”고 했다. “(그동안) 국민과 역사 앞에 교만하지 않았는지 되돌아보면서 더 낮고 낮은 자세로 국민을 섬기고 국민과 소통하기 위해 노력하겠다”고 했다. 대통령의 진정성을 의심할 이유는 없다. 하지만 스스로 바꾼다는 것은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바뀌려면 무엇보다 지난날에 익숙했던 것들과 결별(訣別)해야 한다. 최고경영자(CEO)형 리더십, 좀 더 명확하게는 ‘정주영(鄭周永)식 리더십’과 결별해야 한다. 정 회장이 한국 산업화에 기여한 공로를 부정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국가는 기업이 아니다. 하물며 지금은 ‘박정희-정주영 시대’가 아니다.
지난 몇 달 동안 이명박 정부에서는 ‘이명박 혼자 뛰었다’(그렇게 국민 눈에 비쳤다). 총리는 있는지 없는지 모를 지경이었고, 장관들도 대통령이 나서기 전에는 움쩍도 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대통령이 한 말씀 하면 잽싸게 복창(復唱)했다. 대통령이 국민건강에 위협을 가하는 일이 있다면 미국산 쇠고기 수입을 우선적으로 중단하겠다고 하자, 그동안 미국에서 광우병이 발생해도 국제수역사무국이 광우병 통제지위를 낮추지 않으면 수입을 중단할 수 없다던 장관이 말을 바꾸고, 총리가 대(對)국민담화를 하는 등 뒷북을 친 것이 생생한 사례다. 이래선 국민이 정부를 신뢰하기 어렵다.
국정철학을 바로 세워야 한다. 이명박 정부는 창조적 실용주의를 내세운다. 그러나 무엇이 창조적 실용인지 국민은 잘 알지 못한다. 김대중-노무현 정권을 부정하는 것이 이 정부의 실용주의인가 하는 정도다. 문제는 반(反) 이후 합(合)으로서의 창조적 가치가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예컨대 전 정권에서 임명된 기관장들을 일괄적으로 몰아내는 것이 성장과 통합을 위한 실용주의적 접근인가. 말과 행위가 다르면 국민의 동의를 구할 수 없다.
전 정권의 이념 과잉(過剩)에 넌더리가 난 국민에게 행위와 실천을 강조하는 실용정부는 시대적 요구일 수 있다. 하지만 실용주의는 유용성(有用性)의 기준이 모호만 만큼 자칫 원칙 없는 편의주의로 전락할 수 있다. 미국의 실용주의가 뿌리내릴 수 있었던 것은 엄격한 프로테스탄트 윤리가 뒷받침되었기 때문이다. 행위 주체의 도덕성이 담보되지 못하는 실용주의는 성공하기 어렵다. 청와대와 내각의 ‘부자 클럽’이 국민 일반과 소통하기 어려운 이유도 거기에 있다. 그 결과가 급격한 민심 이반(離反)이라면 지나친 논리인가.
대통령의 언어는 절제되고 사려 깊어야 한다. 미국산 쇠고기 수입을 전면 개방키로 한 직후 이 대통령은 “일반 시민들이 값싸고 질 좋은 고기를 먹게 됐다”고 했다. 설령 광우병에 대한 국민의 우려를 미처 알지 못했다고 하더라도 타격을 받을 국내 축산 농가를 배려한다면 삼가야 할 말이었다. 광우병 파동과 관련된 책임자 문책 여부에 대해선 “이번에 세게 훈련했는데 뭘 또 바꾸나. 바꾸면 또 새로 훈련해야 한다”고 답했다. 이 또한 사안의 중요성에 비추어 적절치 않은 말이다. 자질이 못 미치는 인물은 미리 퇴출시키는 편이 낫다. 청와대와 내각이 프로야구 2군은 아니잖은가.
전직 대통령이 부적한 말로 국민의 원성을 산 것을 잘 알고 있을 현직 대통령이 자신의 발언에 그토록 무감각할 수 있다는 것은 이해하기 어렵다. 진정 국민을 섬기고 국민과 소통하려 한다면 말부터 조심해야 한다.
‘자신과의 싸움’에서 이겨야
이 대통령은 학습능력이 뛰어나다고 한다. 실패에서 학습효과를 얻는다면 임기 초반의 홍역(紅疫)은 액땜이 될 수 있다. 그러자면 지난날의 ‘성공 신화’와 결별해야 한다. 대선 압승의 기억도 지워야 한다. 이 대통령에게 가장 힘든 일은 자신과의 싸움일지 모른다. 그의 말대로 경쟁자는 없으니까.
전진우 언론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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