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은의 지평선]시인들 찬미한 山河大地, 생존전쟁 모순이…

  • 입력 2008년 5월 20일 02시 57분


평화롭고 아름다운 자연 풍경 속에도 처절한 생존 경쟁의 논리가 숨어 있다. 고은 시인은 자연에 숨은 약육강식의 모진 법칙을 본다. 눈부시게 핀 꽃들도 계절이 지나면 소리 없이 이울어 갈 것이다.
평화롭고 아름다운 자연 풍경 속에도 처절한 생존 경쟁의 논리가 숨어 있다. 고은 시인은 자연에 숨은 약육강식의 모진 법칙을 본다. 눈부시게 핀 꽃들도 계절이 지나면 소리 없이 이울어 갈 것이다.
아까시 꽃이 비탈에 언덕에 흐드러졌다. 막 시작된 녹음의 여기저기 아까시 꽃밭으로 백발이 성성하다.

이 아까시나무를 흔히 아카시아라고 잘못 쓰고 있다. 진짜 아카시아는 아열대 대만까지 올라와 있는 열대 식물이다.

한국의 산야에는 해마다 더 많이 아까시가 불어나고 있다.

연 사흘 한잔 마시고 울고 한잔 마시고 울던 시인 박용래가 대전으로 돌아가서 보낸 엽서는 ‘아카시아 꽃을 바라보며 돌아왔지’라고 시작했다. 나도 20여 년 전까지는 아까시를 세상 그래도 아카시아 운운으로 살았다.

그런데 이런 오류는 이따금 지적당해도 한 번 뿌리내린 그대로 끄떡도 않는다. 뿌리내린다는 것은 그 뿌리를 뽑아내는 일이 불가능하거나 어렵다는 뜻일 것이다. 시대의 여러 변화 의지가 기성사회의 세력 앞에서 그 가능성을 오래 약화시키는 것과도 같은 것이다.

세상은 아직도 정정되어야 할 사실이나 진실이 얼마나 많은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번 굳어진 오류는 그것에 시간이 더하면 더할수록 어이없게 하나의 정당성까지 되어 버린다.

아까시와 아카시아 사이의 그런 관계는 알고 보면 세상에 널려 있다.

저 1950년대 후반 이승만은 유난히 아까시를 싫어했다. 원산지가 북아메리카인 그것이 메이지유신 이래의 일본 땅에 많이 심어졌다. 그것이 식민지 조선에도 건너왔다.

정작 그는 일제 잔재를 정치로서 잘 활용한 반면 식민지의 풍경으로 느껴진 아까시에 대한 그의 혐오감은 별났다. 그래서 공무원들이 해당 지역 아까시나무를 없애는 일로 수고가 많았다.

나무가 권력과 관련된 것은 그 뒤 1960년대 후반 박정희의 은수원사시나무이다. 민둥산투성이였던 당시 빨리 자라날 수종을 개발할 때 태어난 효자나무였다.

농과대 교수 현신규가 속성재배 품종으로 만들어 낸 것이 그것이다. 박정희가 몹시 좋아했다. 어서 우쭉우쭉 자라나서 내가 지휘하는 근대화 국토의 풍경을 과시하라는 염원이었다.

나무 이름도 현신규사시나무라 지으라고 할 정도였다. 그 뒤 은수원사시나무에서 현사시나무로 바뀌었다. 성(姓) 한 자를 갖다 붙인 것이다.

과연 이 나무는 묘목으로 심은 지 얼마 가지 않아서 10m, 15m짜리 키다리나무로 자랐다. 여름 그늘이 시원했다. 그러나 지금은 눈병 나무로 베어낼 처지이다.

최단 시일에 성장해버리는 속성인 이 현사시나무와 함께 아까시나무는 왕성한 번식을 자랑한다. 실지로 한국의 산야는 어느새 아까시 숲으로 바뀌어갈지 모르는 그런 풍경이 되어간다.

지난날의 식민지시대와 전란시대의 남벌로 인한 늙은 토질의 민둥산이 연탄의 등장으로 녹색을 되찾은 것이다.

한국의 삼림 분포는 다행히도 잡목림으로 되었다.

여러 품종이 한데 어울려 있는 미덕이었다. 그런데 이 아까시나무의 번식은 다른 나무들을 밀쳐내는 왕성한 힘을 발휘한다. 남과는 못 사는 나무인지 모른다.

흔히 우리의 사색(思索)에서 시야가 좁은 한 나무 보기가 아니라 넓은 시야로 숲 전체를 보라 한다. 그럴 뿐 아니라 숲의 여러 종류 나무들이 더불어 살고 있다고 강조함으로써 인간사회의 이기주의와 어떤 독선을 반성케 하는 비유가 되기에 이른다. 숲에는 공존 공생이 있다고.

그러나 저 들 한복판 무슨 무논 가운데 내려앉은 황새의 신기(新奇)한 풍경이 실은 그 황새가 열심히 먹이를 찾고 있는 처절한 풍경이라는 것을 잊듯이 우리는 숲 속의 처절한 생존경쟁을 간과하고 있다.

아니, 숲 속의 그 경쟁은 동물들의 그것보다 더 모질다.

어느 책이 인용하고 있는 것처럼 모로코 사막 외인부대의 구호 ‘전진하라 그렇지 않으면 죽으리라’와 같은 그런 자연계에서의 경쟁에서 패배나 양보는 바로 멸종 내지 사망을 의미한다.

나는 지난날의 산중 생활에서 나무의 세계, 숲의 세계가 얼마나 척박하고 잔인한 생존의 극한 생활인지를 여러 차례 목격했다. 그럴 때 선조들이 내뱉는 산하대지(山河大地)의 찬가나 옛 시인들이 산천초목에서 절창을 이루어내는 일들이 그것의 허상을 드러낸 사실도 알게 되었다.

이 세계는 이런 생존의 경쟁과 전쟁이라는 생명의 모순으로 구성되었다. 다른 생명을 죽여서 그것을 먹어야 산다는 이 벗어날 수 없는 생명 유지의 비극이 곧 나라는 기구한 목숨에도 해당되지 않는가.

흐드러진 아까시 꽃의 한철도 곧 이울어 간다.

책.

누구에게는 그냥 종이 다발이다. 흰 것은 종이이고 검은 것은 글자이다. 옛적에는 봉지 담배를 말아 피웠고 뒷간에서 요긴하게 뜯어 썼다.

책.

누구에게는 정신이다. 학교다. 생애의 영원한 숙제이다. 아니, 자손 대대로 전하는 긍지이다.

내 증조할아버지는 논어를 만 번 읽었다. 내 할아버지는 술 여러 섬을 마시고 책을 몰랐다. 내 고향의 한 할멈은 뜻도 모르고 금강경 만 번을 읽었다.

지금 어느 누구도 이런 책읽기의 풍속을 알 까닭이 없다. 고향이란 TV만 있는 곳이다.

책.

대학 도서관들이 기증 도서를 결코 환대하지 않는다.

책.

이사할 때의 그 막막함이란….

더구나 실용 실용 실용이라는 구호의 시대에 책 속의 해묵은 당위는 필요 없다. 입시문제집, 와인해설집, 당뇨치료사례집, 증권거래지침서 따위가 책의 실용이다.

이런 환경에서 인문의 활자문명이 아직 떡 버티고 있는 것은 지상의 마지막 은총이다.

살아 있는 동안 읽은 것보다 읽을 것이 얼마나 더 많은가.

읽을 것이 없는 것.

더 이상 읽어 행복할 필요가 없는 것.

읽어 오늘의 영혼이 어제의 영혼이 아닌 경지로 나아가는 축복이 제거된 것.

그것들이 내 지옥이리라. 한 권의 책 기뻐라.

고은 시인·서울대 초빙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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