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글픈 장면이다. 국회법은 국회의장의 당적(黨籍) 보유를 금지하고 있다. 초당적이고 중립적으로 국회를 운영하라는 뜻에서 2002년 이만섭 의장 시절 만든 조항이다. 그런 법 조항을 뻔히 알면서도 기자가 ‘당론과 다른 경우’를 물은 이면엔 “어차피 한나라당 당론에 따라 행동할 것 아니냐”는 짐작이 담겨 있다. 안 대표가 “그건 (의장에) 당선되고 난 다음에…”라고 말꼬리를 흐린 것은 역시 ‘중립할 자신’이 없어서일까.
▷직권상정이라는 말엔 ‘날치기’의 부정적 이미지가 짙게 드리워져 있다. 과거 여당들은 종종 국회의장의 직권상정 권한을 이용해 법안을 본회의에 직접 상정한 뒤 ‘수(數)의 힘’으로 날치기 처리를 시도하곤 했다. 의장은 의장석이 아닌 본회의장 통로 한가운데서 여당 의원들의 엄호 아래 법안 통과를 외치거나 본회의장 2층 기자실에서 표결 결과를 선언하기도 했다. 역시 2002년 국회법에 ‘의장은 표결 결과를 의장석에서 선포한다’는 희한한 조항(113조)이 신설된 것도 날치기 때문이었다.
▷어제 임 의장은 국회를 방문한 경제5단체장들에게 “한미 FTA 비준 동의안을 직권상정하면 토론과 합의의 의회정신은 실종될 것”이라고 했다. 그러나 임 의장은 그런 말을 할 자격을 지난해 스스로 내팽개쳤다. 그는 이용희 국회부의장에게 사회권을 넘겨 BBK특검법안의 직권상정을 사실상 ‘사주(使嗾)’했다. 선거 도중에 상대당 후보의 비리를 캐겠다고 입법권을 휘두른 건 한마디로 ‘의회 쿠데타’였다. 이제 와서 임 의장은 “BBK는 국내 문제고 한미 FTA는 성격이 전혀 다른 사안”이라고 둘러댄다. 요령부득의 변명이다. BBK 같은 정치적 사안이야말로 정파간 합의와 토론이 중요하고, 한미 FTA처럼 국익과 직결되는 사안이야말로 의장의 거시적 결단이 필요하지 않은가?
김창혁 논설위원 cha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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