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길동과 호모 모빌리쿠스의 공통점은 한마디로 신출귀몰이다. 이곳과 저곳에 동시에 존재하는 ‘편재성’은 인간의 가장 근본적인 욕망 가운데 하나라고 하니 500년 전의 허균은 소설적 상상력 속에서, 그리고 현대의 우리는 첨단기술을 기반으로 그 욕망을 채우고 있는 셈이다.
그런데 최근 과학기술 연구개발에서도 신출귀몰한 편재성이 새로운 이슈로 급부상하고 있다. 사이버상에서 연구인력, 대용량 데이터, 첨단 연구장비를 자유롭게 공유할 수 있는 e사이언스 연구 환경이 바로 그것이다. 이는 연구 효율성을 획기적으로 높일 수 있는 최고의 인프라이기 때문에 큰 호응을 얻고 있다. 실제로 e사이언스 연구환경을 활용하면 연구개발 시간과 비용을 수십, 수백 배 줄일 수 있다. 오죽하면 미국이 미국과학재단(NSF) 전체 예산의 4분의 1을 통째로 e사이언스에 투자하고 있겠는가.
e사이언스의 핵심원리는 간단하다. 기존의 연구환경에서 연구자들은 첨단장비를 사용하기 위해 장비가 있는 지역을 직접 찾아가거나, 필요한 거대 데이터를 저장장치에 담아오거나, 적합한 협업인력과 직접 만나 연구개발을 해야 했다. 그러나 e사이언스 연구환경 안에서 연구자들은 첨단 정보기술(IT)과 고성능 연구망을 이용해 사이버상에서 언제 어디서나 원하는 연구개발을 수행할 수 있다.
해당 연구과제에 적임자라고 판단되면 대전에 있든 워싱턴, 도쿄에 있든 어떤 연구자와도 팀을 이뤄 협업연구를 할 수 있고 아무리 비싼 장비라 하더라도 공동으로 사용할 수 있어 비용과 시간을 크게 줄일 수 있다. 물론 데이터를 옮기고 저장하는 과정에서 소요됐던 시간낭비도 없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이미 선진국 과학기술자들 사이에 ‘e사이언스 선도국가=과학기술선진국’이라는 공식이 확고히 자리 잡았다. 우리나라도 2005년부터 국가 e사이언스 구축사업을 추진하고 있다. e사이언스를 시작한 것은 선진국에 뒤지지만 세계 최고 수준의 IT 인프라를 기반으로 이미 미국 영국과 견줄 만한 기술력을 갖추게 됐다. 올해부터는 기반 구축의 단계를 넘어 e사이언스를 연구현장에서 직접 활용하는 실질적인 응용단계에 올라섰다.
그 어느 때보다도 과학기술에 대한 국민의 기대가 큰 요즘이다. 국민은 지난 수십 년간 찢어지게 가난했던 대한민국을 세계 10위권의 경제대국으로 만든 첨병이 과학기술이었듯 앞으로도 과학기술이 선진국 진입의 견인차가 돼 줄 것을 강력하게 요구하고 있다.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e사이언스 연구환경 구축을 통한 연구 효율성 강화가 선행돼야 한다.
과학기술인의 태도도 바뀌어야 한다. 기존에 익숙해져 있던 연구방법을 버리고 e사이언스를 선택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일 것이다. 변화는 언제나 고통과 인내를 동반하는 법이니까. 모든 연구자가 도전정신을 가지고 e사이언스 연구환경을 적극적으로 활용해 세계 5대 과학강국의 꿈을 실현해 나갈 수 있기를 바란다.
양병태 한국과학기술정보연구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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