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횡설수설/허문명]소비자운동

  • 입력 2008년 6월 21일 03시 01분


김이환 한국광고주협회 부회장은 20일 새벽 익명의 시민들에게 봉변을 당했다. 전날 광고주협회가 인터넷 포털 업체인 다음과 네이버에 ‘동아, 조선, 중앙일보에 광고를 낸 광고주를 협박하는 사이트를 관리해 달라’는 내용의 공문을 보낸 게 빌미였다. 김 부회장은 “어떻게 집 전화번호까지 알았는지 새벽부터 차마 입에 담을 수 없는 욕설과 상소리를 퍼부었다”면서 “자유로워야 할 광고주의 마케팅 활동을 이런 식으로 방해하는 것은 시장경제에 대한 테러”라고 분노했다. 문제는 이런 폭력이 ‘소비자운동’으로 포장되고 있다는 데 있다.

▷서울대 여정성(소비자학) 교수는 “소비자운동은 특정 상품에 불만이 있는 해당 소비자가 불매운동 등을 통해 의사 표현을 하는 것인데, 자신과 견해가 다른 기사를 실었다고 그 매체에 광고를 한 광고주를 익명으로 협박하는 것은 소비자운동의 너울을 쓴 명백한 정치운동”이라고 말했다. 숙명여대 문정숙(소비자경제학) 교수도 “소비자운동이냐 아니냐를 떠나 자본주의(를 지탱하는) 토대인 ‘경제주체들의 자유로운 활동’을 인정하지 않겠다는 것은 체제에 대한 위협”이라며 “남이 먹는 음식이나 입은 옷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그것들을 만든 기업을 협박하는 것과 다름없다”고 지적했다.

▷과거의 소비자운동이 ‘소비자 보호’에 중점을 뒀다면 현대는 소비자의 선택과 행동에 책임을 지는 경제주체로서의 ‘소비자 주권’이 강조되는 추세다. 소비자정책도 단순한 피해 보상 차원을 넘어 상품 구입 전에 관련 정보나 약관을 충분히 숙지했는지 등 소비자의 사전 노력을 강조하고 있다. 거짓과 협박으로 기업을 곤경에 빠뜨리기 일쑤인 ‘블랙 컨슈머’ 시대에 소비자는 약자이니 기업을 상대로 무슨 짓을 해도 좋다는 식의 행태(광고주 협박)는 교역규모 세계 13위인 한국의 위상에 비춰 부끄러운 일이다.

▷이들은 자유민주주의의 핵심 가치인 ‘언론자유’부터 짓밟고 있다. 1970년대 동아일보 백지광고 사태 때는 독재권력이 광고주에게 광고를 싣지 말도록 압박하는 방식으로 언론을 탄압하더니 지금은 악의적인 ‘익명의 시민’들이 권력을 대신하고 있다. 군부독재를 대체하는 ‘군중독재’를 꿈꾸는 것인가. 성숙한 시민정신이 이를 용납할까.

허문명 논설위원 angelhuh@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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