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국선언이 유난히 많았던 시절은 4·19 전후와 1970년대의 유신(維新)시대, 10·26사태 및 12·12쿠데타 직후인 1980년 ‘서울의 봄’ 상황, 그리고 1987년 6월 민주항쟁 때였다. 그 시절의 시국선언은 독재에 대한 국민의 저항권 행사라는 의미가 있었다. 4·19 당시 “학생들의 피에 보답하라”는 전국대학교수단 시국선언은 이승만 대통령의 하야를 이끌어 낸 결정적 계기가 됐다. 독재와 인권문제가 주요 이슈였던 유신시대와 6월 항쟁 때도 민주화를 요구하는 각계의 시국선언이 잇따랐다. 시국선언의 주무대였던 서울 명동성당은 민주화운동의 성지(聖地)였다.
▷시국선언은 민주화를 열망하는 국민을 결집하는 힘이 있었다. 시국선언 서명자 명단이 길수록 군부독재정권으로서는 큰 부담이었다. 6월 항쟁은 민주화의 원년(元年)을 열었다. 서울대생 박종철 군 고문치사사건과 ‘4·13호헌(護憲)선언’, 연세대생 이한열 군 최루탄 사망사건을 거치며 더 단호해진 각계의 시국선언이 6월 항쟁에 힘을 보탰다. 결국 당시 전두환 대통령은 자신의 후계자이자 대선 후보로 선출된 노태우 민주정의당 대표위원의 건의를 받는 형식을 빌려 ‘대통령 간선제(間選制)’를 포기하고 직선제를 수용했다.
▷5월 초부터 미국산 쇠고기 수입반대 촛불시위가 계속되자 많은 단체가 시국선언 형태의 의견을 발표하고 있다. 어제 남덕우 전 국무총리 등 원로급 인사들의 모임인 한국선진화포럼은 ‘외환위기 때 못지않은 심각한 위기 상황’ 극복을 위한 정부, 국회, 미디어, 국민의 각성을 촉구하는 시국선언을 채택했다. 산업화와 민주화를 넘어 선진화를 표방하는 21세기에 아직도 시국선언을 내고 들어야 하니 착잡하다.
육정수 논설위원 sooya@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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