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 게바라의 혁명 정신도 스타벅스의 카페라테처럼 테이크아웃할 수 있다고 믿는 이 시대에 혁명이란 몸 사이즈가 66에서 44로 줄어들거나, 키가 160에서 170으로 늘어나는 일뿐이다. 젓가락 같은 스키니진을 입고, 미끈한 다리를 자랑하며 ‘마놀로 블라닉’ 같은 구두를 멋지게 소화하는 것 말이다.》
통속적이라고? 세상과 통하잖아!
여행 작가 오영욱 씨는 “휴가지에서는 역시 소설”이라고 이 작품을 추천하면서 “다만, 남자라면 알레르기를 유발할 수 있다”고 했다. 맞다. 평범한 커피 대신 ‘더블 샷 에스프레소’나 ‘화이트 초코 프라푸치노’로 마시고, 명품에 열광하는 여자를 ‘된장녀’라고 여기는 남자라면, 이 소설은 알레르기를 유발할 수 있다.
이 소설의 인물들은 청담동 커피빈에서 약속을 잡고, ‘외면이야말로 내면을 반영하는 거울’이라고 신봉하는 패션계에 종사하며, 지미추의 구두부터 샤넬 캉봉백까지 명품들이 줄줄이 등장하니까. 더욱이 이 소설의 남자주인공 박우진이 잘생긴 외모에 명문대를 수석에 수석을 거듭해 졸업한 외과 의사였다가 갑자기 요리사로 전업해 뉴욕 최고급 레스토랑 주방장을 거쳐 도쿄 파크 하얏트의 제안을 뿌리치고 서울 청담동에 고급 레스토랑을 경영한다는 설정에 이르면 남자들은 피식 어이없는 웃음을 날릴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상관없다. 어차피 이 작품은 20, 30대 여성을 위한 ‘치크리트(Chick-lit)’ 소설이니까. 영화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나 미국 드라마 ‘섹스 앤드 더 시티’를 재미있게 봤다면, 여행짐을 꾸릴 때 올 상반기 베스트셀러인 이 소설을 챙기기를 권한다.
주인공은 프랑스 패션 잡지 ‘A’의 라이선스판인 ‘A매거진 코리아’에 다니는 31세의 미혼 여기자 이서정. 공은 가로채고, 궂은일은 떠넘기는 마녀 같은 여자 상사에게 시달리고, 동료 남자 기자와 쓰는 ‘밤중생활’이라는 섹스 칼럼을 비롯해 영화배우 인터뷰 및 라이프스타일에 관한 기사를 쓴다.
실제로 패션잡지 기자로 일했던 저자의 이력 덕분에 패션계 현장이 생생하게 전달되는 전반부는 흥미롭다. 패션잡지에 대해 “‘마크 제이콥스’라는 단어 하나로 11페이지짜리 현대시를 쓸 수 있는 곳”이라고 하거나 여자 상사의 외모를 “이번 시즌 구찌의 하이힐 굽만큼 뾰족한 저 입술”로 묘사하는 등 문체도 감각적이다.
소설은 두 축으로 전개된다. 이서정과 박우진의 사랑, 그리고 이서정이 ‘닥터 레스토랑’이라는 ‘얼굴 없는 음식비평가’의 정체를 찾아나서는 이야기다. 남녀 주인공이 서로를 오해하다 화해하는 갈등구조는 약하지만 또 다른 축인 ‘닥터 레스토랑’이 밝혀지는 과정은 호기심을 불러일으키며 끝까지 긴장을 유지한다. 오영욱 씨는 추천 이유에서 “빠른 전개가 드라마를 내려받아 밤새워가며 보는 느낌과도 흡사해 여행지에서마저 드라마를 본다는 죄의식이 들 수 있기도 하다”고 했다.
올 하반기 TV 드라마로 만들어질 예정인 이 소설의 미덕은 재미다. ‘깊이’가 없다는 비판을 의식한 걸까? 작가는 주인공의 입을 빌려 말한다.
“…나는 드라마의 통속성이 좋았다. 통속이란 세상과 통한다는 말 아닌가. 그 좋은 말을 사람들이 한껏 폄하해 쓰는 건 어쩐지 부당하다. 지적 만족을 느끼며 니체나 들뢰즈 지젝을 읽고, 타르코프스키나 데이비드 린치의 영화를 비평하듯 보는 사람만 있는 건 아니다.”
강수진 기자 sjka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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