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다가 우연히 이 채석장에서 굴러 떨어지는 돌을 밀고 나르는 일을 거들며 날품을 팔게 되었습니다. 농촌 출신답게 허우대가 껑충하고 뼈대 또한 억센 사나이였으므로 큰 돌덩이를 굴리는 중노동이 그다지 힘겹지 않았습니다.
20년이 넘게 돌 굴리는 일을 계속하는 짬짬이 그는 할석기로 돌을 자르거나 정으로 쪼아서 무언가 소용 있는 물건을 만들어보곤 하였습니다. 기껏해야 도로와 보도 사이에 놓는 경계석이나, 방앗간에 놓을 돌확이나, 비석과 같이 구조가 단순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서당개 3년이면 풍월을 읊는다는 속담이 있듯이, 짬짬이 해 본 일이 성과를 내어 단순한 경계석을 만들어내는 일도 경력이 쌓여 수련공이 되었습니다.
어느 날이었습니다. 낯선 노신사 한 분이 채석장을 찾아와 한 장의 도면을 내밀었습니다. 이 채석장에서 생산되는 돌로 도면에서 제시한 크기의 조형물 하나를 만들어 달라는 주문이었습니다. 부피는 컸지만, 구조는 매우 단순하였습니다. 그는 할석기와 정만을 사용하여 불과 1주일 만에 주문에 답할 수 있었습니다.
첫 번째 생산품이 반출된 이후 1개월이 흘러갔습니다. 채석장에 많은 인사가 찾아오기 시작했습니다. 나중에는 석수장이를 서로 먼저 차지하려고 쟁탈전이 벌어져 자기끼리 삿대질에 드잡이하고 핏대를 곤두세우기도 했습니다. 채석장 인부로 쥐꼬리만 한 월급으로 하루하루 연명하기에 바빴던 석수장이의 수입은 급속도로 불어났습니다.
나중에는 석수장이가 주문을 선택하게 되었습니다. 구조가 복잡하고 제작기간이 오래 갈 것 같은 주문은 가차 없이 퇴짜를 놓고, 구조가 단순하고 손쉽게 제작할 수 있는 주문만 선택했습니다. 예상과는 전혀 다른 반향이 일어났습니다. 주문은 오히려 기하급수적으로 폭주하기에 이르렀습니다.
그로부터 5년 후였습니다. 세계적인 미술 권위지라고 할 수 있는 외국의 어떤 신문에 서울 변두리 채석장에 있는 아무개 씨가 제작한 돌덩이 작품을 찍은 사진 한 장과 석수장이 아무개 씨의 사진이 문자 그대로 대문짝만하게 실렸고, 권위 있는 비평가의 호의적인 해설도 있었습니다. 우리가 보기에는 그 작품사진은 연말이 되면 통과의례처럼 갈아 치우곤 하는 서울 시내 도로에 널린 경계석 한 토막과 조금도 다르지 않았습니다.
작가 김주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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