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횡설수설/허문명]격노(激怒)

  • 입력 2008년 7월 29일 03시 00분


미국 지명위원회(BGN)가 독도를 한국령(領)에서 ‘주권 미지정(Undesig-nated Sovereignty)’, 즉 주인 없는 섬으로 바꿔 명기했다는 보고를 받고 이명박 대통령이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느냐’며 격노했다”고 청와대 관계자가 전했다. 그런데 뉴스 댓글에는 미국이나 일본보다 대통령을 비판하는 내용이 더 많다. ‘격노할 사람은 국민입니다’ ‘마치 남의 탓인 양 생각하시는 것 같네요. 대통령 책임 아닌가요?’ ‘미국에 화를 내셔야지, 왜 죄 없는 부하들한테 화를 내십니까?’ 같은 글들이다. 대통령의 ‘격노’가 민심(民心)의 공감을 얻지 못한다는 증거다.

▷‘격노’가 너무 잦은 때문인 듯싶다. 이 대통령은 인수위 시절부터 자료 외부 유출, 언론사 간부 성향 조사 등 사고가 터질 때마다 ‘격노’한 것으로 보도됐다. 취임 후에는 대통령수석비서관들의 재산 의혹, 공천파동으로 인한 당내 분란, 탁상행정, 최근 금강산 사건 늑장보고에 대해서도 ‘격노’했다고 한다. 화는 내는데 크게 달라진 것은 없다 보니 국민이 시큰둥할 수밖에.

▷‘격노’ ‘호통’ ‘질책’ 같은 표현은 국정 최종 책임자인 대통령이 아랫사람 탓만 하는 인상을 주기도 한다. 대기업 홍보담당 임원은 “마치 기업 최고경영자(CEO)가 부하들을 질책하는 모습을 연상케 한다”면서 “대통령은 CEO와 다르다. 바위처럼 무겁되 한 번 화를 내면 천지가 요동칠 정도는 돼야 하는 것 아니냐”고 했다. 중앙대 법대 이상돈 교수는 홈페이지에서 “대통령은 사건이 일어날 때 안타까워하는 데서 그칠 게 아니라 불같으면서도 차갑게 대처해야 한다”고 말했다. 미국의 레이건 대통령처럼 말은 단호하게, 정책은 강경하게, 그러면서도 유연성과 유머 감각을 잃지 않으면 금상첨화이리라.

▷대통령의 감정이나 말을 여과 없이 전하는 청와대 참모진에게도 문제가 있다. 사안의 심각성을 알리고 경각심을 갖게 하려는 뜻이겠지만 꼭 ‘격노’ 같은 극단적인 단어를 써야 할까. 대통령의 말이 국민에게 어떻게 들릴지 한번쯤 생각해 보고 발표를 해야 할 것 아닌가. 대통령이 ‘격노’보다 더 화를 내면 그때는 ‘대로’라고 할 건가.

허문명 논설위원 angelhuh@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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