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무현 대통령은 ‘동북아 균형자론’을 들고 나왔다. 하지만 외교적 실익(實益)은커녕 논란과 혼란만 키운 끝에 슬그머니 철회했다. 국력이 뒷받침되지 않는 ‘균형자’는 허구라고 확인시켰을 뿐이다.
후진타오 중국 국가주석은 베이징 올림픽 개막식전에서 회심(會心)의 미소를 지었다. 대륙의 굴기(굴起·떨쳐 일어남)를 과시한 개막식을 보고 파이낸셜타임스는 이렇게 썼다. “덩샤오핑이 1970년대 경제개혁을 시작할 때부터 유지해온 중국의 ‘숨죽이고 조용히 내실 쌓기(도광양회·韜光養晦)’ 정책이 끝났다.”
불과 십수 년 전만 해도 중국 곳곳을 휘젓고 다니며 ‘팁 값’ 단위를 올려놓았던 한국인의 자화상이 부끄럽다. 우리 경제는 올림픽 이후 중국 경제의 부침(浮沈)에 따라 웃을 수도, 울 수도 있다. 중국이 잔기침만 해도 한국은 몸살이 나는 경제의 상관관계가 깊어졌다.
미국의 경제분석기관 글로벌인사이트는 중국이 내년에 세계 상품생산의 17%를 차지해, 16%로 밀릴 미국을 따돌리고 제조업 1위 국가로 올라설 것이라고 예측했다. 중국의 세계 상품생산 점유율은 작년 13.2%에서 2년 만에 3.8%포인트나 높아지는 고속 신장세를 보일 것이라는 얘기다.
중국 일본은 더 멀리 달아나고
서쪽이 중국이면 동쪽은 일본이다. 우리는 반도체 자동차 휴대전화 같은 수출 주력상품의 핵심 설비와 부품을 일본에서 사 쓰지 않고는 수출을 못 늘린다. ‘메이드 인 코리아’ 제품 속에서 ‘메이드 인 저팬’이 반짝이며 웃고 있다. 그러니 수출 증대는 대일(對日) 무역적자 확대를 뜻한다. 기술력의 우열도, 미래를 위한 연구개발 투자의 격차도 좁혀지지 않아 숙명처럼 됐다.
올해 상반기 우리는 일본에 상품 147억 달러어치를 수출하고 317억 달러어치를 수입했다. 반년 적자가 170억 달러(약 17조 원)이고, 연간으로는 400억 달러(약 40조 원)에 달할 것이라는 전망이 나온다. 이와는 별도로 여행, 운수, 통신, 특허권 등 서비스수지의 대일 적자도 해마다 급증해 작년엔 28억 달러(약 2조8000억 원)를 웃돌았다. 상품도, 서비스도 적자를 줄일 길이 막막하다.
중국과 일본에 경제적 기술적으로 이처럼 구속되고 밀리면서 동북아 중심이니, 균형자니 해봐야 세계의 비웃음만 산다. 그런데도 전직 대통령들은 국내 정치용으로 그런 말을 지어냈다. 그 기간에 일본은 독도를 자국령 또는 최소한 영토분쟁 대상으로 만들기 위해 치밀한 국제 홍보전을 펴고 자국민을 세뇌했다. 중국은 고구려사를 중국사에 편입하려는 동북공정에 그치지 않고 제주도 남쪽 이어도에 대한 영유권까지 들먹이고 있다.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의 미주미식(美酒美食)은 세계 어느 지도자도 따라가기 쉽지 않다. 그런 사람이 폐쇄경제로 2000여만 주민을 굶주림으로 몰아넣고 스스로 ‘동냥 왕’이 돼버려 중국 러시아와 접한 백두산 두만강 국경조차 제대로 지켜내지 못하는 형국이다. 주체사상으로 분칠했지만 세계 최빈국의 치욕이 어디까지 갈지, 동족으로서 두렵다.
한국은 지금 우물 안 싸움질에 바람 잘 날이 없다. 우리도 지난날엔 열심히 달렸다. 맨발에 잘해야 짚신이던 것이 ‘숨쉬는 운동화’로 바뀌고, 하루 두 끼 죽도 못 먹다가 음식 쓰레기 많이 버리기로 세계 선두권에 올라섰다. 광복 63년, 건국 60년의 짧은 기간, 특히 1960∼90년대 4반세기 사이에 기적을 이뤘다.
한국은 건국 60년에 싸움질만
그러나 이를 가능케 한 대한민국 건국이념이자 헌법정신인 자유민주주의, 시장경제, 국제협력(대외개방), 법치주의(법의 지배)는 폄훼되거나 도전받고 있다. 국회부터 법치와 대의(代議)민주주의를 스스로 부정하는 세력에 발목 잡혀 있다. 시민사회에서도 경쟁과 준법으로는 살아가기 어려운 세력이 무정부주의적 행태마저 보인다.
정부와 여당은 국정 교란을 업(業)으로 삼는 이런 정치사회세력에 효과적으로 대응하지 못하고 있다. 정부 여당다운 소명의식과 의지, 식견과 능력으로 국민을 설득하지도, 국면을 바꾸지도 못했다.
이렇게 8·15를 맞고, 앞서가는 나라들의 뒷전에서 정치사회적 내분(內紛)만 계속한다면 동북아의 중심이 아니라 변방(邊方)의 나락으로 더 깊이 빠져들 것이다. 뜻있는 국민이 자구(自救)의 목소리를 내고 행동에 나설 수밖에 없다.
배인준 논설주간 injoo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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