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광장/조동호]대북정책, 실천 가능한 것부터

  • 입력 2008년 8월 21일 20시 04분


아니나 다를까, 광복절 경축사에서도 대북정책은 보이지 않는다. 남북대화를 이야기했지만 북한에 대화에 나서라는 일방적 요구였으며, 경제협력 추진을 거론했지만 북핵 문제가 해결된 이후에나 하겠다는 의미였다. 현재의 시점에서 무엇을 하겠다는 ‘정책’은 없었다.

이해는 된다. 6자회담은 지지부진하고 북한은 요지부동이다. 이러자니 진보진영이 걸리고, 저러자니 보수진영이 반발한다. 국제관계에서, 남북관계에서, 그리고 국내 정치적으로 쉽지 않은 처지에 놓였다. 그렇다고 언제까지나 정책이 없는 상태로 남북문제를 가져갈 수는 없다.

방법은 하나다. 임기 말을 생각하라는 것이다. 단순하게는 둘 중 하나의 선택이다. 이번 정부 임기가 끝나는 시점에서도 현재처럼 남북관계가 정체돼 있어도 상관없다고 결심하든가, 아니면 이번 정부에서도 나름대로의 남북관계 진전을 가져와야 한다고 판단하든가, 둘 중 하나를 결정해야 한다.

나는 전자의 선택도 결코 나쁘지 않다고 생각한다. 그동안 쌓여온 남과 북의 잘못된 인식과 관행을 바로잡는 효과가 있다. 일관성 없이 강온을 오락가락한 김영삼 정부, 지나치게 순진한 희망으로 접근한 김대중 정부, 정책목표가 북한 변화에 있음에도 북한의 개방 개혁을 이야기 말자고 한 노무현 정부.

남북관계 정체 땐 비판 받을것

우리의 퍼주기는 지속됐고 북한의 떼쓰기는 강화됐다. 능력 없이 정부 지원에 기대 대북사업에 나서려는 기업과 비정부기구(NGO)도 늘어만 갔다. 국제사회 초미의 우려이자 민족의 미래가 걸린 북한 핵실험이 있어도 대북 지원은 진행됐고 남북 경협은 오히려 확대됐다. 그러다 보니 북한은 매년 쌀과 비료, 약품과 의복을 받으면서도 도리어 큰소리를 쳤다. 분명 바로잡아야 할 일이다. 5년간의 정체는 그만큼 효과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전자의 선택은 정치적으로 가능하지 않을 것이다. 분단국가를 이끄는 대통령이 남북관계 개선에 관심이 없다고 할 수는 없다. 정부 초기라 잠잠하지만 시간이 갈수록 남북관계 정체를 비판하는 국민의 목소리는 높아갈 것이다. 그때쯤엔 이산가족과 국군포로 및 납북자 가족들이 촛불을 들지 모른다.

이번 정부의 초대 통일부 장관은 남북관계 정체를 참아낼 수 있겠지만 둘째 셋째 장관으로 갈수록 점차 부담은 커질 것이다. 북-미관계가 호전되고 북-일협상도 재개되는 상황에서 북한이 먼저 반성하고 변화하지 않는 한 아무것도 하지 않겠다는 생각을 우리만 유지하는 모습이 바람직한가의 문제도 있다.

결국 후자의 선택으로 갈 수밖에 없다. 전자의 실천 가능성이란 희박한 현실이며, 남북관계의 정체보다는 진전이 당연히 우월한 대안인 까닭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먼저 더욱 적극적인 대화의 손을 내밀어야 한다. 지난 정부에서의 합의도 진정으로 인정해야 한다.

이런 선택이 현 정부의 정체성을 훼손하지는 않는다. 대통령이 7월 국회 개원연설에서 우리 스스로 과거를 부정할 이유가 없으며, 특정 정권 차원이 아니라 민족 장래의 관점에서 남북관계를 만들어가야 한다고 선언한 정신으로 돌아가는 것일 뿐이다. 3월 통일부 업무보고에서 대통령은 “새로운 정부는 남북 간에 있어서 진정성을 가지고 또 열린 마음으로 서로 협의해 나갈 것”이라며 어느 한쪽도 일방적이 될 수는 없으므로 “서로 인정할 것은 인정”해야 한다고 발언했다.

이를 위해 지난 시절을 무조건 ‘잃어버린 10년’이라고 무시하지 말고 발전의 ‘토대를 닦은 10년’으로 평가해야 하고 또 그렇게 만들어나가야 한다. 그렇게 하기 위한 정책을 속히 마련해야 한다. 북한에 다시 끌려 다니라는 것이 아니다. 원칙을 버리라는 얘기가 아니고, 6·15 및 10·4선언을 그대로 이어받으라는 얘기도 아니다.

관계개선 위해 먼저 대화 제의를

문제가 되는 조항은 수정하고 바람직한 합의는 실행하기 위한 당당한 대화를 제안하고 지난 정부와는 달리 북한을 선도할, 차별화된 정책방안을 수립하라는 뜻이다. 현 정부가 출범 초기부터 대북정책 추진 원칙으로 내세우는 ‘원칙에 철저, 접근엔 유연’을 실제로 실천하라는 의미이다. 바로 그것이 대통령이 취임사에서 밝혔듯이 남북관계를 이념의 잣대가 아니라 실용의 잣대로 풀어가기 위한 첫걸음이기도 하다.

조동호 이화여대 교수·북한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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