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의 풍경 20선]<2>모던뽀이, 경성을 거닐다

  • 입력 2008년 8월 27일 02시 46분


◇모던뽀이, 경성을 거닐다/신명직 지음/현실문화연구

《“도시 소시민이 창밖 도회 풍경을 바라보는 풍경은, 거리를 걷는 여성 혹은 전차 창밖을 바라보는 여성에 비해 무척 어둡고 시무룩하다. 근대의 꿈 혹은 아스팔트의 환상을 아무리 현실로 옮기고 싶어도 그것이 실현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1930년대 경성의 꿈은 그 실현을 방해하는 식민지라는 현실에 막혀 절망으로 변모되고 만 것이다.”》

유쾌하거나 우울한 ‘식민지 도시남녀’

한국사에서 ‘근대’라는 시기는 묘한 위치다. 조선 왕조가 힘을 잃어버리면서 열강들의 먹이가 됐다가 끝내 일본 제국주의에 짓밟혔다. 외국의 앞선 문물이 밀려들어 오기 시작했고 유교 획일주의에서 벗어난 모더니즘도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특히 1920, 30년대는 옛것과 새것이 섞이며 새로운 문화가 발현되는 ‘멜팅 폿(melting pot·도가니)’의 시대였다.

이런 가운데 등장한 군상이 ‘모던-보이’와 ‘모던-걸’이었다. 이들은 신학문과 신매체를 통해 서구 문물을 익히며 전근대성을 벗어나려 했던 젊음이자 일제강점기에 피어난 ‘하이브리드(hybrid·혼종 혹은 교종)’였던 셈이다. ‘모던뽀이, 경성을 거닐다’는 이들의 삶과 문화에 주목한 책이다.

일본 구마모토가쿠엔대 동아시아학과에서 강의를 하고 있는 저자는 모던족을 들여다보는 돋보기로 ‘안석주의 만문만화(漫文漫畵)’를 선택한다. 석영 안석주(1901∼1950)는 화가, 문인, 배우이자 영화감독이었으며 ‘우리의 소원’의 원가사를 지었다. 그가 동아일보 등에 실었던 ‘만문만화’는 일본의 ‘만화만문’에서 유래된 것으로, 시사나 풍자적 소재를 바탕으로 한 만화 그림과 짧은 글을 일컫는다.

팔방미인이었던 안석주는 만문만화에서 다양한 소재를 넘나든다. 세계화와 근대화에 노출됐던 경성은 ‘만화경(萬華鏡)’ 그 자체다. 잘생긴 총각과 밀회를 즐기는 젊은 첩, 다 쓰러져가는 초가집에 살면서 양복을 빼입은 룸펜 신사, 방학 귀향길에 일제 상품을 손에 든 학생들, 댄스홀과 찻집, 기생집의 세태….

100년 가까이 지난 과거지만 근대의 삶은 오늘날 모습과도 이어진다. 청계천을 경계로 북쪽 종로통은 가난한 전근대적 거리, 남쪽 명동은 번화한 백화점 거리로 나뉘는 게 오늘날 강남 강북 구도를 보는 듯하다. 값비싼 장신구 치장에 골몰하는 젊은 여성들은 ‘된장녀’ 논쟁과 닮았다. 고등교육을 받고도 취직이 안 돼 다방이나 공원에서 시간을 죽치는 지식인의 풍경도 낯설지 않다.

“실업자의 심경은 그가 아니면 모른다. 아츰에 뜨는 해도 보기 실코, 밤에 뜨는 달도 보기 실코, 모든 색채 모-든 움즉이는 물체, 아모리 조흔 소리라도 다- 듣키 실코, 도대체 사는 것이 실타. (…) 돈 십전만 잇스면 찻집이 조타고 드러가나 컵피차 한 잔만 먹고 왼종일 안저잇슬 수는 업스니, 길로 헤맨다. 이래서 양복쟁이 룸펜이 된다.”(1934년 ‘도회점경’ 중에서)

만문만화가 암울한 세태만 전하는 게 아니다. 초여름 밤 한강변에서 보이는 젊은 남녀의 사랑가, 여성들이 제 목소리를 내기 시작한 모습들은 ‘유쾌한 근대’를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모던-보이’가 들려주는 근대는 움츠렸으되, 꿈틀거리는 시대의 기운이 담겼다.

정양환 기자 ra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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