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의 풍경 20선]<5>경성상계

  • 입력 2008년 9월 1일 02시 59분


◇경성상계/박상하 지음/생각의 나무

《“1899년 음력 사월 초파일, 미국인 기업가 콜브란이 ‘번갯불 먹는 괴물’ 또는 ‘축지법 부리는 쇠바퀴’라 불린 생전에 듣도 보도 못한 전차를 종로 거리에 선보였다. 지금의 서대문 로터리인 경교에서 종각∼종로∼동대문까지 전차가 달리기 시작한 것이었다. 소문을 듣고 몰려든 사람들로 운행이 거의 불가능할 정도로 북새를 이루었다.”》

일본상인과 겨루며 성장한 ‘토착자본’

19세기 말 개항(開港)부터 일제강점기를 거쳐 1945년 광복. 그 사이 조선 왕조는 몰락하고 서양 문물이 유입되면서 자의든 타의든 이 땅에서 근대화가 진행되고 있었다. 짚신이 점차 고무신과 구두로 바뀌었고 달구지와 인력거 옆에 어느 샌가 전차가 달리고 있었다.

금난전권(禁亂廛權)으로 조정의 보호를 받았던 종로 네거리의 육의전 시전 상인들이 전부였던 경성에는 일본 상인들이 밀려들었고 그에 맞선 상인들이 성장하기 시작했다.

‘경성상계’는 개항 이후 광복에 이르기까지 옛 서울인 경성 상계(商界)의 변화와 그에 따른 생활상 변모 과정을 보여준다.

1910년 전후 조선에 처음 등장한 자동차는 ‘쇠당나귀’로 불렸다. 당시 시중에는 “궁궐에 이상한 소리를 내며 제 스스로 달려가는 괴물이 있다”는 소문이 돌았다.

1928년 택시요금은 4인 기준으로 1원(현 시세로 12만 원)이었다.

1922년 9월 신문에는 치열한 광고 전쟁이 펼쳐졌다.

“강철은 부서질지언정 별표고무는 찢어지지 아니한다! 고무신이 질기다 함도 별표고무를 말함이오….”

“경고!! 일 년간 사용, 확실 보증품. 가짜 거북선표가 많사오니 속지 마시고 거북선표를 사실 때에는 아래 그림과 같이 거북선 상표에 물결 바닥을 사십시오.”

평양의 일본인 잡화상 사환이었던 이병두가 구두 모양의 일제 고무신을 짚신 모양으로 바꾸어 내놓아 대박을 터뜨린 직후였다.

세태는 왕족까지 먹고 살기 위해 상업에 뛰어들 정도로 변하고 있었다. 경상도 관찰사(도지사)를 지낸 왕족 이재현이 대표적이다. 그는 경성 거리에 유리창으로 반짝이는 새로운 근대 건축물들이 여기저기 들어서기 시작하던 1913년 유리공장을 경영하는 기업가로 변신한다.

건설 경기가 시들해진 상황에서 제1차 세계대전이 나자 인플레이션을 예상해 쌀을 사재기했던 그는 그해 가을 수십 년만의 대풍년이 들면서 폭삭 망하고 말았다.

월급 받는 직장인이 늘면서 1930년대에는 ‘샐러리맨’에 대한 얘기가 심심치 않게 나온다.

‘삼천리’의 인터뷰 기사에 따르면 1936년 당시 전속 가수 월급은 60원(현 시세 720만 원), 버스차장은 하루 수입 75전(현 시세 9만 원)이었고 신문기자 월급은 70원(현 시세 840만 원)이었다고 한다.

핵심 상권을 둘러싼 토착 상인과 일본 상인 간 경쟁도 치열했다.

일제강점기 청계천 이북 종로를 중심으로 한 북촌(北村)은 ‘조선인 거리’, ‘혼마치(本町)’로 불렸던 진고개(충무로와 을지로 일대) 중심의 남촌(南村)은 ‘일본인 거리’로 불렸다. 종로 화신백화점과 남촌인 현 신세계백화점 자리에 있었던 미쓰코시백화점의 경쟁은 그래서 한일 상권의 대결이기도 했다. 화신백화점은 ‘조선의 백화점’이란 신문 광고를 내 애국심에 호소하기도 했다.

황장석 기자 surono@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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