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의 풍경 20선]<9>근대라는 아포리아

  • 입력 2008년 9월 5일 03시 00분


◇근대라는 아포리아/고사카 시로 지음/이학사

《“서양과의 접촉 및 서양 열강의 침략은 중국이 가장 빨랐고 일본, 조선으로 이어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양문화 수용에 대한 각국의 논의인 중국의 중체서용(中體西用)은 (일본의) 화혼양재(和魂洋才)보다 40년 늦었고 조선의 동도서기(東道西器)는 20, 30년 늦었다. 근대화(서양화)라는 하나의 기준으로 연대를 비교하면 조선은 30년, 중국은 40년 뒤에 일본의 뒤를 좇는다. 왜 이런 차이가 생겼는가.”》

닮은듯 달랐던 朝中日新문물 수용철학

아포리아는 해답을 찾기 곤란한 난제(難題)를 말한다. 저자에게 근대는 아포리아다. 근대를 처음 접하고 사람들이 근대를 어떻게 이해했는지, 그들이 이해한 방식을 다시 현대의 우리가 어떻게 이해할 수 있는지는 풀기 어려운 퍼즐이다. 저자는 한국과 중국 일본 가운데 일본의 근대화가 가장 빨랐던 이유에 대한 일본 주류학계의 담론을 비판한다.

근대화론이 주장하듯 ‘일본(민족)의 우수성’이나 전(前)근대 시기에 이미 사회 문화적으로 근대화를 촉진시킬 요소들을 발전시키고 있었다는 근대화준비론이 답이 될 수 없다는 것이다.

일본이 아시아에서 최초로 근대화에 성공한 이유를 개국(開國)이 가장 빨랐던 점을 들어 개국 시기의 차이에 따른 것으로 설명하는 데 대해서도 식민지 지배를 받은 조선과 중국 등의 고통을 외면해 온 오만함을 반성하는 것 이상의 의미가 없다고 주장한다.

이 같은 비판에서 출발한 저자는 조선과 중국 일본의 근대화 과정의 차이를 분석한다. 그에 따르면 ‘동양적 가치관을 지키면서 서양의 과학기술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절충주의적 논리’로서 세 나라에서 각각 발현한 동도서기와 중체서용, 화혼양재는 닮은 듯했지만 전혀 달랐다.

일본의 경우 화혼(일본의 정신)과 양재(서양의 재주)는 같은 비중으로 받아들여졌지만 조선에서 동도(동양의 도)와 서기(서양의 기술)는 그렇지 않았다. 동도와 서기는 차원이 다른 것이기 때문에 제도를 뺀 서양의 기술적인 것만 받아들이면 된다고 생각했다는 것이다.

또 ‘중국을 강하게 하고 중국학문을 지키려면 서양학문을 배워야 한다’는 맥락에서 등장한 중체서용은 사실상 근대화에 대한 비판을 위한 것이었다. 저자는 세 나라가 받아들인 서양문명의 내용이 ‘일본은 학문과 기술, 조선은 기독교, 중국은 공산주의’로 특징지어진다고 말한다.

같은 유교 문화권이었던 세 나라의 민족주의의 내용이 역사 속에서 어떻게 다르게 형성됐는지도 분석한다.

일본의 존황양이론(尊皇攘夷論)은 서양의 기독교를 부정하며 천황제 중앙집권국가를 구축하는 과정에서 나온 것이었고 조선 후기의 위정척사(衛正斥邪) 사상은 국내에 퍼지던 천주교를 이단이라고 배척한 이데올로기 투쟁이었다는 것이다. 중국의 배만흥한(排滿興漢)은 만주족이 지배한 청나라의 역사가 막을 내리고 중화사상이 붕괴하는 과정에서 생겨난 것이라고 말한다.

저자는 세 나라의 민족주의가 서양의 ‘기독교와 부르주아 제국주의’에 맞섰을 때 나온 대응도 전혀 달랐다고 지적한다.

일본은 천황제를 의사종교(疑似宗敎)처럼 떠받들며 유교를 포기하고 제국주의 노선을 걸은 반면 한국은 기독교와 자본주의에 대한 저항 속에서 망설이다가 일본의 식민지가 됐고 이어 일제에 대한 저항으로 기독교를 받아들였다는 것이다. 중국은 농민들 사이의 유토피아적 대동사상이 기독교를 매개로 반봉건 투쟁 이데올로기가 된 뒤 공산주의 운동으로 이어졌다고 분석한다.

황장석 기자 surono@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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