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헌-자료 DB화 시급… 종이신문 장점 계속될 것
언론인 주로 받던 인촌상, 언론학자가 받게돼 영광
“옛 신문의 향기를 맡을 때면 늘 흥분이 됩니다. 몰랐던 역사적 사실을 발견할 때면 숨을 쉴 수 없을 정도죠. 마치 탐험가가 새로운 땅을 찾아낼 때의 기쁨과 비교할 수 있어요.”
제22회 인촌상(언론출판 부문) 수상자로 최근 선정된 정진석(69·언론사) 한국외국어대 명예교수는 평생 언론사 연구의 외길을 걸어 온 학자다. 정 교수는 “일제강점기와 전쟁을 겪은 한국 언론사는 단순한 언론사가 아니다”라며 “개화사, 독립운동사, 정치사, 외교사, 문학사 등 한국 근현대사 핵심 인물들의 활동 무대였다”고 강조했다.
정 교수는 1970년대 기자협회보 편집실장으로 있으면서 일제강점기 선배 언론인들의 행적을 담은 ‘신문유사(新聞遺事)’를 연재하면서 언론사 연구를 시작했다. 이후 ‘대한매일신보와 배설’ ‘언론조선총독부’ ‘일제하 민족지 압수기사 모음’ 등 16권의 저서와 5권의 공저, 각종 희귀자료와 신문의 영인본 발간을 통해 구한말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한국 언론사를 실증적으로 연구해 왔다.
―인촌상을 받은 소감이 어떠십니까.
“인촌은 일제강점기부터 해방공간, 6·25전쟁 후까지 언론인이자 교육자, 정치인으로 활동한 현대사의 거목이었습니다. 본인이 직접 글을 쓰거나 강의를 한 사람은 아니었지만 교육기관을 설립해 인재를 배출하고, 신문사를 경영해 인재들의 활동 공간을 마련하는 등 훨씬 폭넓고 높은 차원의 활동을 했지요. 그가 포용한 인재들은 광복 후 대한민국 정부 수립에 커다란 역할을 했습니다. 그동안 언론인들이 주로 인촌상을 수상해 왔는데 언론사 연구학자로서 상을 받게 되니 무척 감개무량합니다.”
정 교수는 평생 한성순보, 한성주보, 독립신문, 대한매일신보, 매일신보, 해방공간 4대 신문 등 역사적 사료 가치가 높은 옛신문을 고증하고 해제를 붙인 영인본을 출판하는 작업에도 앞장서 왔다. 그가 만든 신문 영인본으로 인해 구한말, 일제강점기와 관련한 수많은 생활사와 미시사 연구의 붐이 일어나기도 했다. 정 교수는 언론재단과 공동으로 독립신문을 인터넷에서 PDF 파일로 검색할 수 있도록 만들기도 했다.
―옛 신문 연구에 평생을 매달린 이유는 무엇입니까.
“신문을 읽어보면 사관에 입각해서 쓴 역사책보다 훨씬 생생하게 배울 수 있어요. 저는 독립신문, 대한매일신보를 한 줄 한 줄 다 읽어 보았는데, 우리나라가 왜 망했는지 절실히 느껴지더군요. 해방공간의 신문에는 좌우 대립의 비극, 여수·순천 10·19사건의 현장 르포 등 생생한 장면들이 다 기록돼 있어요. 역사란 한두 마디로 단정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요즘 젊은 역사학자나 언론학자들이 원자료를 잘 읽지 않는 것은 문제입니다. 논객으로 유명한 중견 언론학자가 언론사를 쓰면서 ‘독립신문’도 원문으로 안 읽고 다른 책에서 재인용한 것을 보고 쓴웃음이 나왔습니다.”
정 교수는 대표 저서로 ‘대한매일신보와 배설’ ‘언론조선총독부’를 꼽았다. “남들이 하지 않는 독창적 분야”이기 때문이다. ‘대한매일신보와 배설’은 정 교수가 영국 런던대 정경대에서 받은 박사학위 논문으로 한국과 일본에서 단행본으로 출판되기도 했다. 그는 “영국인 배설이 발행한 항일신문을 둘러싸고 일본과 영국이 주고받은 외교문서를 영국 국립도서관에서 찾아냈을 때 무척 흥분됐다”며 “언론사를 넘어 한국과 일본, 영국의 외교사가 담긴 흥미로운 책”이라고 소개했다.
정 교수는 총독부의 기관지인 매일신보, 경성일보를 통해 일제의 식민통치 언론정책을 연구한 ‘언론조선총독부’를 펴내기도 했다. 그는 “국내에서 일본인들이 발행한 신문은 한국 언론사 연구의 매우 중요한 미개척 분야”라고 지적했다.
“국내 언론사 연구에서 일제가 발행한 신문은 철저히 배제해 왔어요. 임근수 선생은 한일강제합방부터 1920년 동아, 조선일보 창간 전까지를 ‘무(無)신문기로 불렀지요. 그러나 그 당시에도 하루하루를 기록한 신문은 존재했습니다. 요즘 흥미롭게 보고 있는 게 일본인들이 1890년 인천에서 발행한 ‘조선신보’, 1895년 발행한 ‘한성신보’입니다. 당시 국내 신문에서는 볼 수 없던 와인, 바이올린 교습소, 아사히 맥주, 자동차 등의 광고가 등장합니다. 정월 초하루 지면은 광고가 넘쳐 60페이지나 됐을 정도지요. 이들 신문이 일본 외무성에 보조금을 요청하는 문건에는 ‘한국 사람들도 우리 신문을 본다’고 기록돼 있어요. 국내 생활사, 광고사, 풍속사 연구에도 귀한 자료입니다.”
―지난 정권에서 과거사 논란이 거셌습니다. 근현대사 연구의 올바른 방법은 무엇입니까.
“노무현 정권에서 과거사를 파헤친다고 수많은 기관을 만들고 엄청난 인력을 쏟아 부었는데도 별 성과 없이 사회적 갈등만 초래했습니다. 정부는 무엇보다 과거사 연구의 기반이 되는 옛 문헌과 자료를 데이터베이스화하는 작업에 적극 나서야 합니다. 그래서 전문가들이 그 자료를 토대로 자연스럽게 연구할 수 있도록 해야지요. 그런데 상근직원과 돈을 쏟아 부어 단기간에 연구해 결론까지 내리려다 보니까 친일이니, 좌파니 하는 무리한 역사 해석과 이념 다툼이 벌어지게 된 것입니다.”
정 교수는 “방송은 전파력이 뛰어나지만 하루만 지나면 다시 찾아보기 힘들다”며 “반면 신문기사는 수백 년이 지나도 검색이 가능하고, 편집을 통해 뉴스의 가치를 비교할 수 있기 때문에 종이신문의 장점은 통합미디어 시대에도 계속될 것”이라고 내다봤다.
전승훈 기자 raphy@donga.com
:정진석 교수:
△중앙대 영문과, 서울대 신문학과 대학원,
영국 런던대 정치경제대 박사
△1971년 한국기자협회 편집실장
△1978년 관훈클럽 사무국장
△1980년 한국외국어대 신문방송학과 교수
△위암장지연기념사업회, 서재필기념회 이사
△‘일제하 한국언론투쟁사’ ‘언론과 한국현대
사’ 등 16권의 저서와 공저 5권, 편저 11권.
‘대한매일신보’ ‘한성순보’ ‘독립신문’ 등 구
한말부터 6·25전쟁기까지의 신문 영인작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