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2회 인촌상 인문사회문학 부문 수상자인 차하순(79) 서강대 명예교수는 광복 이후 당시로선 생소하던 서양사 공부를 시작했다. 개척자들이 그렇듯 그의 학문 여정은 순탄치 않았다. 선배 학자들이 닦아 놓은 학문적 토대는 빈약했고 변변한 교재조차 없었으며, 푸대접과 무시를 당하기 일쑤였다. 그런 상황에서 책과 논문을 쓰고 후학을 양성하면서 서양사라는 학문의 기초를 닦은 그의 업적을 역사학계는 입을 모아 평가한다. 1976년 쓴 ‘서양사 총론’을 비롯해 그가 쓴 책들은 여전히 서양사 전공자들의 필독서다.
―필요성이 잘 알려지지 않은 분야인 서양사를 전공하게 된 이유는 무엇입니까.
“원래는 자연과학을 공부하려 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과학기술이 중국에서 먼저 발달했는데도 서양이 동양보다 더 진보한 과학기술문명의 특성을 갖게 된 이유가 궁금해졌습니다. 그래서 역사적 배경을 알아보겠다는 마음에 손을 댄 게 서양사였습니다.”
―세계사적 보편성을 늘 강조하셨는데….
“다른 문화권을 제대로 인식해야 우리 전통과 문화의 창조성을 높일 수 있습니다. 민족문화라는 것은 열린 문화여야 합니다. 창조적 민족문화를 만들려면 세계의 보편적 가치와 연결돼야 합니다.”
차 교수는 고전적 평등주의 이론의 문제를 지적하는 ‘형평(equity)’ 개념을 도입한 학자로도 유명하다. 1969년 미국 브랜다이스대의 지도교수로부터 독창성을 인정받으며 역사학 박사학위를 받은 논문 제목은 ‘17세기 정치이론에서의 형평 개념’이다. 그는 이를 확장해 1983년 펴낸 ‘형평의 연구’를 필생의 역저로 꼽는다.
―형평 개념을 통해 설명하는 평등은 어떤 모습입니까.
“원래는 사법적 용어입니다만 이를 정치적 개념화했습니다. 고전적인 평등의 개념에 문제가 있다는 데서 출발합니다. 형평 개념에 따르면 인간은 기본적으로는 평등해야 하지만 모든 사람이 사회생활에서 무조건 똑같아질 수는 없습니다. 정의로운 평등, 정당한 평등이 이뤄져야 합니다.”
―정당한 평등을 구체적으로 설명해 주시면….
“예를 들어 대통령은 교통신호를 무시하고 달릴 수 있습니다. 그 모습을 보고 ‘일반인은 안 되는데 대통령은 왜 되느냐’라고 해선 안 됩니다. 대통령이 직책을 수행하기 위해 불가피하게 신호를 무시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직능, 직무, 공적 등에 따라 평등에도 차이를 둘 수 있다고 보는 게 형평 개념입니다. 평등 원칙에는 어긋나지만 대통령의 직능을 존중하므로 형평 차원에선 합당하다는 뜻입니다.”
―형평 개념은 오늘날 한국 사회에서도 생각해볼 여지가 많은 것 같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사회가 형평의 원리대로 움직이지는 않습니다. 교육의 평준화를 예로 들 수 있습니다. 모두가 출발점은 같지만 차이가 생기게 마련이고, 그 차이를 인정하면서 각자의 능력에 맞는 교육을 실시하는 게 형평에 맞는 겁니다. 능력은 있는데 재정적으로 어려움이 있는 학생들은 특별히 지원을 해주면 됩니다. 지방을 우선시하는 ‘균형발전론’도 정당한 평등이 아닙니다. 수도권 사람들로선 오히려 역차별을 받는 셈이니까요.”
―1960년대 이후 역사학계에서 ‘서강학파’의 전성기를 여는 데 큰 역할을 하셨다는 평가가 있습니다.
“1961년에 서강대 역사학과에 부임한 뒤 혼자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다른 대학에 계시던 이기백 교수, 이광린 교수, 이보형 교수, 길현모 교수 등 당대 사학자들을 서강대로 모셔 왔습니다. 남의 대학 교수 다 뽑아간다는 비판도 받았지만 그 덕에 서강학파는 1980년대까지 역사학계에서 남다른 학문적 영향력을 자랑할 수 있었습니다.”
―군사정부 시절 현실 비판에 적극적이셨는데요.
“유신을 거쳐 신군부 시절까지 학생들이 매일 시위를 하는 상황에서 지식인의 현실 참여에 대해 고민을 많이 했습니다. 학생들과 시위를 같이할 수도 있겠지만 그보다는 사회평론을 하는 게 적절하다고 판단했습니다. 그래서 동아일보를 비롯해 신문, 잡지에 사회를 비판하는 글을 많이 기고했습니다. 1980년에는 ‘지식인 105인 선언’에 참여했다가 군부에 끌려가기도 했고 강단에서 쫓겨날 위기에 처하기도 했습니다.”
―후학들에게 당부 말씀을 해주시죠.
“편견, 선입견을 갖지 말고 균형 있는 판단을 하도록 스스로를 훈련해야 합니다. 자기와 맞지 않는 역사관에 대해서도 열린 마음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무엇보다 세계를 하나로 보는 역사관을 갖는 게 중요합니다. 세계 각국의 역사를 잡탕으로 엮은 세계사(world history)가 아니라 세계를 하나의 공동체로 보고 전쟁 질병 환경 빈곤 기아 같은 공동의 주제를 바라보는 세계사(global history)적 시각을 가져야 합니다. 한국사 전공자든, 서양사 전공자든 전 지구적 문제를 역사적으로 고찰하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금동근 기자 gold@donga.com
● 차하순 교수
△서울대 문리대, 서울대 사학과 대학원 문 학석사, 미국 브랜다이스대 역사학 박사
△1961∼1994년 서강대 교수
△1982∼1984년 역사학회 회장
△1985∼1993년 유네스코 한국위원회 위원
△1999년∼현재 국제역사학 한국위원회 위원장
△2002년∼현재 대한민국학술원 회원
△저서 ‘서양사 총론’ ‘부르크하르트와 니체’ ‘사관이란 무엇인가’ ‘형평의 연구’ ‘서양사 학의 수용과 발전’ ‘역사의 본질과 인식’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