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의 풍경 20선]<16>한국 근대 청소년 소설 선집-쓸쓸한 밤길

  • 입력 2008년 9월 18일 02시 59분


◇ 한국 근대 청소년 소설 선집-쓸쓸한 밤길/최시한 최배은 엮음/문학과지성사

《“이 망할 녀석, 먹으라는 밥을 먹지 않아서 밥이나 먹고 자라고 하쟀더니…” 하고서 주먹을 들고 덤벼들며, “어디 좀 맞아보아라!” 하고서 또다시 덤벼든다. 진태는 아무것도 변명하지 않았다. 그러나 하루에 두 번씩 매를 맞게 되니까 무엇이 원망스럽고 또 무엇을 저주하고 싶었으나 그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였다. 그래서 그는 한참 얻어맞고 혼자 울었다. 그는 위로해주는 사람 하나 없고 쓰다듬어주는 사람 하나 없었다. -나도향 ‘행랑 자식’》

가난해서 서럽던 식민지 청소년들

일제강점기 보통 교육이 실시되면서 ‘어린이’와 ‘청소년’ 개념이 등장한다. 두 개념 모두 근대의 산물이다. 이 책은 1920년대 청소년의 생활과 내면을 들여다 볼 수 있는 단편 15편을 모았다. 작가는 이태준 방정환 송영 등 11명.

교장 집 행랑아범의 아들 진태는 눈을 치우다 교장의 신발을 더럽혀 매를 맞는다. 어머니의 은비녀를 전당포에 맡기고 사온 쌀을 바닥에 떨어뜨려 또 매를 맞는다. 서럽게 운다. 억울하지만 무엇을 원망할지도 모른다.(나도향 ‘행랑 자식’)

그들은 서러웠다. 너나 할 것 없이 가난해서 서러웠고, 월사금을 내지 못해 서러웠고, 집에서 뼈 빠지게 일을 해야 했기 때문에 서러웠다. 가난에서 해학이 머리를 내민다. 가난한 창남이는 동네에 불이 나자 ‘샤쓰’를 입지 못하고 학교에 간다. 다른 학생들 모두 양복저고리를 벗고 ‘샤쓰’만 입고 있는 체조시간, 선생님이 왜 윗옷을 벗지 않느냐고 묻자 창남이는 ‘만년 샤쓰(맨몸)’도 괜찮은지 묻는다.(방정환 ‘만년 샤쓰’)

서러움을 극복하는 것은 그때나 지금이나 ‘우정’이다. 반찬가게가 잘 안 돼 학교를 다니지 못하게 된 칠성이를 위해 동무 명환이는 가게 광고지를 만들어 돌리고, 칠성이는 다시 학교에 다닐 수 있게 된다.(방정환 ‘동무를 위하여’)

교육적 목적을 띠고 정의와 정직을 강조한 작품도 있다. 학교 야구부 투수인 순길이는 자신의 학비를 대준 김 변호사로부터 자신의 아들이 속한 팀에 져 달라는 부탁을 받지만 승리한다. 김 변호사는 순길이를 칭찬하고 이후의 학비도 대주겠다고 약속한다.(이정호 ‘정의의 승리’) 최병화의 ‘참된 우정’도 이 범주에 속한다.

이태준의 ‘쓸쓸한 밤길’의 영남이는 가혹한 현실을 견딜 수 없어 가출하기도 한다.

“‘나가자, 나가자! 이놈의 집을 나가면 그만이다’ 아! 밤길은 쓸쓸하였습니다. 고향을 떠나는 것이 슬펐고, 어머님 생각과 발목이 아파서 절름거리며 울면서 걸었습니다. 그러나 밤은 머지않아 밝을 것이며, 한참씩 달음질쳐 앞서 가던 바둑이가 도로 와서 영남이의 옆을 서 주고 서 주고 하였습니다.”(‘쓸쓸한 밤길’)

영남이는 부모를 잃은 뒤 친척 어른의 횡포로 집과 재산을 모두 빼앗긴 채 구박을 당하자 설움에 겨워 집을 나온다. 함께 떠나는 것은 ‘바둑이’밖에 없고 멀리서 들려오는 파도소리에 앞날 걱정이 밀려오지만 그는 계속 길을 걷는다. 엮은이는 “나라 잃은 설움을 빗대어 그린 것으로 읽을 수도 있다”고 설명했다.

엮은이는 “어른을 독자로 삼는 일반 소설 및 어린이 대상의 동화와 구별되는 청소년 소설은 근대에 생겨났다”며 “고아나 결손 가정이 많고 청소년들이 일을 해야 생계를 유지할 수 있었던 당시 현실을 반영해 부모를 그리워하거나 가난 때문에 고통 받는 이야기가 많다”고 말했다.

조종엽 기자 jjj@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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