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횡설수설/홍찬식]민중미술

  • 입력 2008년 9월 29일 02시 59분


1980년대 시위 현장에는 대형 걸개그림이 단골로 등장했다. 걸개그림은 강렬한 색채와 현실 비판적인 내용을 담아 분위기를 고조시켰다. 이른바 민중미술 화가들이 그린 작품이었다. 미술도 사회 변혁에 동참해야 한다는 생각에서 1980년대 초 시작된 민중미술은 미술관이나 갤러리의 울타리에서 벗어나 대학가와 정치집회로 파고들었다. 걸개그림 외에도 깃발그림 벽화 판화같이 다양한 형식이 시도됐다. 미술을 생활에 밀착시키기 위한 전략이었다. 그러나 그 많던 민중미술가는 1990년대 이후 감쪽같이 사라져 버렸다. 마치 열대성 저기압이 한순간에 소멸되듯이.

▷우리 사회의 민주화가 성취되고 동유럽권 몰락으로 사회주의에 대한 환상이 깨지면서 민중미술도 급속히 퇴조했다. 순수한 미술운동이 아니라 미술을 정치와 변혁의 수단으로 삼은 민중운동의 한계였다. 참여와 의식을 앞세우다 보니 작품의 미적 수준이 떨어지고 독창성이 부족하다는 평가를 받는다. 한때 문화계를 휩쓸었던 예술 사조의 결말치고는 허무하기 짝이 없다. 민중미술가들에게 이론적 틀을 제공한 인사는 현재 국립현대미술관장으로 재직 중인 미술평론가 김윤수 씨.

▷잊혀진 민중미술이 다시 화제에 올랐다. 국립현대미술관이 지난해 민중미술 계열의 미술품 149점을 집중 구매한 사실이 드러났기 때문이다. 지난해 이 미술관이 수집한 미술품의 56%를 차지한다. 화가라면 누구나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자신의 미술품을 사주길 바라고 있다. ‘민중미술의 대부’로 불리는 김 관장으로서는 이런 편향 구매를 삼갔어야 한다. 국립현대미술관으로서 최소한 지켜야 할 공정성이나 금도와는 거리가 멀다.

▷김 관장은 지난 정권에 의해 코드 인사로 임명된 이후 연임의 혜택까지 누렸으나 정권 교체 이후 퇴진을 거부하고 있다. 민중미술의 퇴조에 대해 문화계 내부에서는 민중미술을 주도한 핵심 인사들이 정부로부터 지원금과 혜택을 받으며 권력화하고, 민중을 생각하는 초심(初心)을 잃었기 때문이라는 지적이 나온다. 김 관장은 그렇게 권력화한 사례이고 이번 논란은 도덕성을 앞세우는 그들의 이면을 보여준다. 편중 구매 한 가지만으로도 왜 예술이 정치화하면 안 되는지 알 수 있다.

홍찬식 논설위원 chansik@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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