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혀’ 볼 수 없었던 것이란 학생시위에 공공연하게 등장한 반미 구호와 학내의 친북 서클이다. 물론 학생시위와 반정부 서클은 늘 있었다. 그러나 유신체제와 긴급조치 하에서도 반독재와 민주화 구호는 있었어도 반미나 친북 구호는 없었다.
‘거의’ 볼 수 없다가 이 무렵 부쩍 늘어난 것은 교수의 자가용차. 교수뿐만 아니라 많은 봉급생활자에게도 이때부터 마이카 시대가 열렸다. 건국 후 처음으로 국제수지가 흑자로 돌아서고 인플레는 한 자리 수치로 안정됐다. 봉급 인상과 저축 이자가 물가상승을 웃돌았으니 봉급쟁이의 실질 소득이 늘어난 결과이다.
모든 연대에 명암은 있다. 그러나 1980년대는 다른 연대와는 비교할 수도 없이 명암의 대비가 심각했다. 공정을 기하기 위해 80년대 5공 정권의 공과(功過)를 함께 들어보자. 먼저 ‘공’부터.
첫째, 5공 정부는 성장 전략가 박정희도 끝내 이루지 못한 한국경제의 안정 기조를 성취했다. 둘째, 올림픽의 성공적 유치와 개최로 한국의 대외적 이미지와 국민의 자긍심 향상에 큰 기여를 했다. 셋째, 대통령 전두환은 우리나라 헌정사상 최초로 평화적 정권교체의 선례를 남겼다.
‘광주’ 이후 반미-친북 구호 등장
어느 하나 만만치 않은 대단한 공이다. 그러나 그 모든 공을 집어 삼켜버릴 만큼 전두환 정권의 과(過)는 엄청나다. 12·12쿠데타로 국가기강의 중추인 군의 위계질서를 뒤흔들어 놓은 것은 5·16의 선례가 있으니 덮어두자. 문제는 광주 대참살! 참으로 있을 수도 없고 있어서도 안 될 끔직한 일을 저지르고 말았다. 그것은 당시 독일의 한 온건한 권위지 특파원 보도와 같이 ‘국토 안에서 국군이 국민을 적대한’ 일대 참극이었다.
그 참극의 두 주인공이 뒤를 이어 집권하면서 국민의 마음을 더욱 참담하게 만든 점은 권좌에서 물러날 때마다 수천억 원씩의 비자금을 챙겼다는 사실이다. 광주의 참극으로 집권한 장군 대통령이 챙긴 비자금의 전말을 알게 된 젊은이들이 ‘국가 허무주의’에 빠졌다 해서 놀랄 일인가. 그들이 대한민국을 더 이상 ‘내 나라’라고 생각하지 않게 됐다면 그게 1차적으로 누구 잘못이란 말인가.
광주 이전이 아니라 광주 이후 대학 캠퍼스에 비로소 반미와 친북 구호가 등장했다(1960년대 말부터 세기말까지 대학에 몸담고 있던 사람으로 이건 분명하게 증언해 둔다). 근래 국방부는 교육과학기술부에 전달한 고교교과서 개정안에 전두환 정부는 ‘권력을 동원한 강압정치를’ 한 것이 아니라 ‘일부 친북적 좌파의 활동을 차단하는 여러 조치를 취하지 않을 수 없었다’고 수정을 요구했다고 전한다.
사려 분별없는 교과부가 우선 한심하다. 교과서 개정에 각계 견해를 수렴하려면 위원회를 구성해 전문가에게 자문을 해야 옳지, 정부부처에 개정의견을 공식 요청하다니…. 국방부 안에도 여러 의견이 있을 터인데 전두환 정권에 대한 한 직원의 의견이 국방부 전체의 공식 견해가 돼도 좋다는 말인가.
12·12쿠데타의 두 주역에 대해선 좌파 정부가 아니라 우파 정부라 할 김영삼 정권하에서 이미 ‘성공한 쿠데타’도 죄를 물어 두 전직 대통령을 단죄했다. 교과부와 국방부는 김영삼 우파 정부의 법통까지 부정할 정도로 ‘파쇼화’하고 있다는 오명을 이명박 대통령 정부에 뒤집어씌울 생각인가.
과거 놓고 한없이 다퉈서야
나라의 미래를 놓고서는 무엇을 어떻게 할 것인지 여러 의견이 갈릴 수도 있고 다툴 수도 있다. 미래는 가능성의 영역이고 자유의 영역이다. 미래를 위해 여러 대안이 나와 서로 우열을 따진다는 것은 바람직스럽기까지 하다. 그것은 독재 체제에선 용납 안 되고 민주 체제에서만 가능한 일이다.
그러나 나라의 과거를 놓고 의견이 갈리고 다툰다는 것은 바람직스럽지 않다. 과거는 가능성의 영역도 자유의 영역도 아니라 사실의 영역이다. 바꿀 수도 돌이킬 수도 물릴 수도 없는 기정사실의 영역이다. 과거를 놓고 한없이 의견이 갈리고 다툰다는 것은 나라와 국민을 위해 다같이 불행한 일이다.
최정호 울산대 석좌교수·본보 객원大記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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