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호택 칼럼]최진실의 못 이룬 꿈

  • 입력 2008년 10월 10일 20시 04분


한강의 야경이 내려다보이는 최진실의 집에서 ‘신동아’(2005년 11월호) 인터뷰를 한 적이 있다. 내가 집을 찾아갔을 때 그는 촬영 현장에서 돌아와 샤워를 끝내고 화장기 없는 얼굴로 머리에 두건을 두르고 있었다. 오후 10시 반에 시작한 인터뷰는 자정을 넘기며 세 시간가량 문답으로 펼쳐졌다. 주인공을 맡은 드라마 ‘장밋빛 인생’이 시청률 40%를 넘기며 한창 뜨고 있을 무렵이었다.

최 씨는 이혼 소동을 겪은 후 인터뷰 요청을 극력 기피하고 있었다. 강지원 변호사가 “예사 옐로 페이퍼와는 다르고, 인생을 논할 만한 상대”라고 분위기를 잡아줘 인터뷰가 성사됐다. 최 씨를 광고모델로 썼던 아파트 건설회사는 남편(조성민)과 육박전까지 벌인 요란한 이혼 때문에 회사가 이미지 손실을 입었다며 손해배상을 제기했다. 이 사건의 대리인이었던 강 변호사는 “최진실은 이혼 직후에도 아주 위험한 상태였다”고 말했다.

“‘애들 때문에 못 죽겠다’는 말을 입버릇처럼 했습니다. 불면증과 불안장애로 고통을 겪었죠. 이혼한 것도 견디기 어려운데 ‘안티 최진실 카페’ 회원들이 아무것도 모르면서 악담을 퍼붓는다고 괴로워했습니다. 내가 ‘댓글 보지 말라’고 말렸는데도 잠을 못 이룰 때 컴퓨터를 켜놓고 그런 글들을 읽었습니다. 연예인은 남들이 뭐라고 말하는지 본능적으로 신경이 쓰이는 모양입니다. 심리치료를 받아보라고 권유했는데 소문 날까 봐 꺼리더군요.”

속내 드러낸 한밤 인터뷰

최 씨는 인터뷰에서 본격적으로 연기 공부를 하고 싶다는 꿈을 피력했다. 내가 “여배우는 실컷 키워봐야 시집가면 연기생활을 그만둔다”고 감독들이 불평하더라는 말을 전하자 그는 “그 반대”라고 말했다. 여배우가 인생이 뭔지, 사랑이 뭔지를 알게 돼서 그런 연기를 할 만하면 출연할 작품이 없다는 것이었다.

할리우드에는 50대 60대의 여배우들이 출연할 영화가 많지만, 한국 영화계는 ‘이슬을 먹고 사는’(최 씨 표현) 문근영 또래의 배우들을 위한 영화만 찍어댄다. 나는 최근 ‘닥터 지바고’(1965년)에서 ‘라라’로 출연했던 줄리 크리스티(67)가 치매 노인의 부부생활과 사랑을 그린 ‘어웨이 프롬 허(Away from Her)’에서 곱게 늙은 모습으로 원숙한 연기를 하는 것을 보고 감명을 받았다.

최 씨는 나이가 들면서 삶의 쓴맛 단맛이 함께 우러나오는 연기를 보여주려는 꿈을 갖고 있었다. 그는 “더 늦기 전에 연극영화과에 들어가서 연기 공부를 하고 싶다”고 말했다.

응접실과 주방 곳곳에 자녀들의 사진이 걸려 있었다. 아버지 조 씨의 사진은 모두 치운 것 같았다. 최 씨는 전남편에게 미련이 아직도 남아 있음을 절제된 표현으로 이야기했다.

“애들 아빠니까 잘됐으면 하는 마음입니다. 그 사람이 저한테 보물 같은 자식을 준 게 고마운 일이죠.” 내가 ‘조 선수가 친권(親權)은 포기했지만 자식을 만나볼 권리는 있는 거죠”라고 묻자 “제 마음이 이럴진대 매일이라도 못 만나겠어요”라고 대답했다.

최 씨가 속으로는 전남편의 가정 복귀를 간절히 기대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조 씨가 만나는 상대 여성이 그런 기대를 갖게 했을 수도 있다. 최 씨는 아이들의 친권을 넘겨받으면서 조 씨가 진 수억 원대 빚도 갚아줬다. 최 씨는 이혼한 가정에서 성장한 고통을 자녀에게 대물림하지 않으려는 마음이 강했다. 그가 시끄러운 공방을 벌이면서도 이혼을 안 해주려고 버틴 것은 그 때문이었다고 말했다.

최 씨는 전남편의 재혼 상대와 재혼 시기에 대해 무척 상처를 입었다고 한다. 결혼생활을 깨는 빌미를 제공했던 바로 그 여인이었다. 최 씨가 자녀의 성(姓)을 ‘조’에서 ‘최’로 바꾸어 달라고 법원에 신청한 것은 올 5월. 보통의 경우 재혼한 어머니들이 의붓아버지와 성이 다른 자녀들의 부담을 덜어주기 위해 자녀의 성을 바꾸어 준다. 최 씨는 그때까지 재혼하지 않고 있었다. 인터뷰에서는 평생 혼자 살겠다는 결심을 털어놓았다. 나의 통속적 상상력으로는 조 씨에 대한 마지막 미련을 버리면서 자녀의 성에 남아 있는 그 사람의 흔적을 지웠던 것 같다.

“늦기 전에 연기공부 하겠다”

겉으로 보면 톱스타는 부러울 게 없는 대중의 우상이다. 그러나 인간의 행복은 밖으로 드러난 것보다 내면의 세계가 더 중요한지도 모른다. 최 씨는 이혼으로 상처를 너무 크게 받았다. 그는 조 씨가 이혼 사유로 주장한 몇 가지 습관에 대해 “진즉에 알았더라면 다 고칠 수 있었는데…”라며 탄식했다. 이혼의 자책(自責)이 지나쳐 마음에 깊은 병이 들었다.

삶의 험한 파도와 인격살인의 댓글이 여배우의 꿈을 집어삼켰다. 우리는 사랑스럽고 귀엽고 아까운 배우를 잃었다.

황호택 수석논설위원 hthwa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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