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과 내일/오명철]슬픈 중산층

  • 입력 2008년 10월 16일 02시 59분


경제와 수치에 둔감해서 그런지 지수로 나타난 불황을 피부로 실감하지 못한다. ‘가계부채 사상 최대’ ‘소비자 기대심리지수 크게 하락’ ‘8월 경상수지 사상 최대 적자’ ‘대기업 체감경기 5년래 최악’이니 하는 것들 말이다. 하지만 최근 잇따라 주변에서 듣게 된 사연들로 불황의 골이 심각하다는 것을 인식한다. 민초들의 생생한 육성은 그 어떤 경제 지표보다 현실적이기 때문이다.

“중산층이 다 서민층 됐죠 뭐…”

어쩌다 택시를 탈 때마다 밑바닥 민심을 가장 잘 알고 있는 기사들에게 이런저런 세상사를 묻곤 한다. 얼마 전 한 기사에게 “요즘 경기가 어떠냐”고 물었다. 60대의 점잖은 기사 아저씨는 “중산층이 다 서민층 됐죠 뭐. 서민층은 빈곤층 되고…”라고 말했다. 최근의 경제 현황을 이처럼 단순명쾌하게 설명하는 얘기를 듣지 못했기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기사 아저씨는 서울 강남의 중산층 아파트 일대를 지나면서는 “강남 사는 사람이 다 부자라는 것도 실상을 모르는 얘기예요. 빚 없이 강남에 집 가지고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되겠어요. 택시 안에서 우는 사람도 있어요”라고 덧붙였다. 20년 넘게 중산층으로 자부했던 내 자신의 생활도 최근 몇 년 새 이런 식으로 흘러왔기 때문일까, 그의 말이 심금을 울렸다.

대기업 임원인 대학 동창은 최근 6, 7년 동안 부어 온 개인연금신탁을 깨뜨려 ‘빚잔치’를 했다. 부인도 몇 년 전부터 생활전선에 뛰어든 그가 이런 선택을 하게 된 것은 고교 3학년과 2학년 두 자녀의 과외비에, 최근 경기불황으로 부인이 하는 커피숍의 적자가 이어지고 있기 때문. 그는 “남들은 나를 상류층으로 생각하겠지만, ‘생활은 중산층, 실상은 서민층’이라고 해야 맞다”고 자조했다.

얼마 전 이종 동생이 느닷없는 전화를 해왔다. 경기 성남시 분당에서 부동산중개업으로 착실히 돈을 모아 48평형 아파트에 살고 있는 성실한 사람이다. 대학 1학년과 고교 2학년 딸을 두고 있는 그는 대뜸 “형. 어디 우리 집사람 일자리 알아봐 줄 수 없어. 아무래도 집사람을 생활전선에 내보내야 할 것 같아”라고 힘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IMF 때보다 더 어려운 것 같아. 그때는 싼값의 부동산 거래라도 있었지만, 지금은 전혀 거래가 없어. 생활비는 어떻게 해결한다손 쳐도 아이들 교육비는 도무지 감당할 수가 없어. 집사람이 음식 솜씨가 괜찮으니까 어디 식당 ‘알바’ 자리라도 없을까”라고 풀죽은 목소리로 물었다. 마땅히 도움을 줄 수가 없어 더 미안하고 가슴이 아팠다.

서울대 입구 뒷골목에서 소규모 편의점을 하던 고교 동창은 최근 가게와 자신의 아파트를 매물로 내놨다. 부부가 24시간 교대로 영업을 해봤자 빚만 늘어가기 때문이다. 성실하기로는 둘째가라고 해도 서운해할 그는 “하루빨리 정리해 은행 대출금을 갚는 것이 상책이라는 생각이 들었다”면서 “아파트 경비원이라도 하겠다”고 해 친구들을 침울하게 만들었다. 그러고 보니 내가 사는 아파트의 경비 아저씨도 영관 장교 출신이다. 관리사무소에는 전직 교사 출신도 적지 않다고 한다. 이전에는 모두 중산층으로 자부하던 사람들이었을 것이다. 직원 인건비라도 벌기 위해 얼마 전부터 야간 대리운전기사로 나섰다는 어느 출판사 사장 이야기나, 낮에는 대학강사를 하면서 밤에는 지하철역 부근에서 노점상을 한다는 박사학위 소지자의 얘기도 들린다.

체감경기, 수치보다 훨씬 심각

최근 기획재정부가 낸 국정감사 자료에 따르면 우리나라 중산층 가구 비중은 1980년대 중반부터 꾸준히 증가했으나 외환위기를 겪으면서 급격히 줄었다. 외환위기 전인 1996년 68.7%이던 것이 지난해에는 58.3%로 감소했다. 같은 기간 가구 소득이 중위소득의 50%에 못 미치는 빈곤층은 11.2%에서 18.0%로 늘었다. 중산층이 서민층이 되고, 서민층은 빈곤층이 된 것이다. 시중에서 체감하는 ‘중산층의 몰락’은 수치보다 훨씬 깊고 심각하다. 엄마만 뿔난 것이 아니다. 중산층도 뿔났다.

오명철 전문기자 oscar@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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