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 있는 구제금융’이라는 칭송까지 듣는 그의 말은 증시 격언으로 훌륭하다. 그러나 어느 나라에서나 누구나 버핏을 따라할 수 있겠는가. 2002∼2006년에만도 461억 달러(약 60조 원)를 기부하고도 남은 재산이 520억 달러(약 67조 원)라는 극히 예외적인 인물이다. 또 미국은 달러를 찍어낼 수 있는 발권력(發券力)을 가진 나라다.
원화(貨) 발권력밖에 없는 한국에서, 그것도 여력이 바닥난 투자자들이 쉽게 버핏을 흉내 낼 수는 없다. 개개 투자자들 이전에 한국경제엔 과연 ‘봄의 전령사’ 로빈새가 날아들 것인가.
정부는 그제 은행들에 대한 1000억 달러 규모의 외채 지급보증을 비롯한 ‘국제금융시장 불안 극복방안’을 내놓았다. 외채 지급보증은 글로벌 금융·신뢰위기 속에서 여러 나라가 이미 취한 조치로, 우리가 한발 늦었다. 이 밖에 외화 유동성 300억 달러 추가 공급 및 원화 유동성 지원, 장기펀드 세제혜택, 중소기업 대출여력 보충 등의 방안이 나왔다.
10·19 대책만으론 불 다 못 끈다
그러나 이 정도 처방으로 ‘달러 및 원화 유동성, 금융기관 건전성 및 지급능력, 실물 경기’ 문제에 충분히 대처할 수 없음은 정부도 잘 알 것이다. 우리 경제는 글로벌 금융위기뿐 아니라 ‘국내에서 만들어진 뇌관들’을 끌어안고 있다. 글로벌 충격에 특히 취약한 것도 국내 위험요인들이 겹쳐 있기 때문이다.
오늘 정부가 건설산업 지원대책을 내놓은 것도 실물경제 안정을 위해 뇌관 하나를 제거하려는 시도로 볼 수 있다. 여기서 잠깐 돌이켜볼 일은 정부가 한 달 전 ‘10년간 주택 500만 채 공급계획’을 발표했다는 사실이다. 미분양 주택이 16만∼25만 채를 헤아리고, 이것이 경제운용의 심각한 짐이 돼버린 상황에서 장기 공급확대계획부터 꺼냈으니 시장에선 ‘앞뒤가 안 맞다’는 반응이 나왔다.
저축은행 부실도 뇌관이다. 일부 저축은행이 ‘이자 8%짜리 상품’까지 파는 것은 비정상이다. 그만큼 부동산 프로젝트 파이낸싱(PF) 부실 등으로 돈줄이 말랐다는 얘기다. 그렇다면 저축은행 뇌관이 터져 결국 국가부채를 더 키우는 상황이 되기 전에 선제 조치를 취해야 할 텐데도 정부는 움직이지 않고 있다.
정부가 최근 공표한 금융·산업 분리 완화정책은 방향이 옳다. 그러나 가계부채 문제를 비롯한 긴급과제들을 밀쳐놓고 ‘매크로 금융정책’만 주무른다는 인상을 준다.
국내 금융정책 기능을 일원화해 맡고 있는 금융위원회는 정책의 우선순위를 바로 짚고 있는가. 무엇보다도 정책 타이밍을 놓치고 있지는 않은가. 이에 대한 의문과 불신이 나라 안팎에 퍼져 있고 이것이 정부 신뢰 약화의 한 요인이다.
10·19 금융불안 극복방안은 사실상 강력한 금융관치(官治)를 공식화한 것이다. 세계 각국도 미증유(未曾有)의 신뢰위기에 대처하기 위해 이 길을 택했다. 우리나라도 이런 신(新)관치가 불가피하다면 ‘관치의 신뢰성’이라도 최대한 높여야 금융과 경제를 살릴 수 있다.
은행에 대한 지급보증 등의 정부 지원은 사실상 공적자금에 준하는 국민부담을 전제로 하는 것이다. 따라서 각 은행의 경영 실태(失態)에 대해 응분의 책임을 물어야 한다. 11년 전 외환위기의 교훈을 잊은 채 되살아난 은행 경영상의 모럴해저드와 키코(KIKO) 영업에서 여실히 드러난 부도덕성을 그냥 덮어선 안 된다.
국내 금융 새 사령탑 적임자 있나
민주당은 외채 지급보증에 대한 국회 동의 조건으로 경제팀 교체와 경제부총리제 도입, 감세법안 철회 등을 요구했다. 불이 나 집이 타들어 가는 판에 ‘소방수를 안 바꾸면 소방차가 지나갈 수 없다’고 하는 소리나 비슷하다.
1997년 외환위기는 강력한 경제부총리제 아래서 맞았다. 경제팀 교체가 모든 협조의 대전제라면 민주당이 인사(人事) 대안을 한번 내보면 어떨까. 그걸 보고 많은 국민이 큰 희망을 느낀다면 이명박 대통령도 생각을 고쳐볼 수 있지 않을까. 금융정책과 시장 대응을 지금보다 훨씬 과단성 있게 적시(適時)에 펼칠 수 있는 신관치 시대의 적임자가 있다면 새 금융 사령탑에 못 앉힐 이유가 없을 것이다. 그것으로 로빈새를 부를 수만 있다면.
배인준 논설주간 injoo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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