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 ‘디 차이트’ 테오 조머 박사
언론인이 무엇인가. 겨레의 개화나 나라의 광복을 위해 계몽적 동기에서 발행된 우리나라 신문과는 달리 유럽의 신문은 오직 돈을 벌기 위한 상업적 동기에서 발행됐다. 따라서 ‘무관의 제왕’ ‘사회의 목탁’과 같이 높은 대접을 받았던 우리나라 언론인과 달리 독일의 언론인에 대한 사회적 평가는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에도 막스 베버가 개탄할 만큼 매우 낮았다. 저널리스트는 인도의 ‘파리아 계층’처럼 사회의 최하위 천민으로 상류사회에서는 눈 매김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제2차 세계대전 후 독일은 세계의 엘리트 신문 대열의 선두에 자리 잡고 있다. 그러한 독일 언론의 쇄신에 가장 큰 기여를 한 신문의 하나가 디 차이트이다. 프랑스 사회학자 자크 카이저 교수는 오래전에 이 신문을 세계 최고의 권위지로 손꼽고 있었다.
디 차이트는 1946년 함부르크의 기업인 게르트 부체리우스 씨가 창간했다. 그는 기민당의 국회의원을 오래 지낸 보수적 정치가였으나 1970년대 중반 신문 발행 편집의 모든 권한을 진보적인 언론인에게 넘겨주고 용퇴하는 도량을 보여줬다.
언론인의 필두에는 붉은 군대의 쓰나미를 피해 동프로이센의 고향 (철학자 칸트의 고향이기도 한) 쾨니히스베르크에서 함부르크까지 백마를 타고 와 디 차이트 창간에 동참한 마리온 된호프 백작부인이 있었다. 그녀는 정치부장, 주필, 발행인으로 94세의 고령으로 운명할 때까지 집필을 계속했다. 그녀의 초청으로 1958년 디 차이트에 합류한 조머 박사도 정치부장, 주필, 발행인의 요직을 두루 거치며 올해로 만 반세기를 디 차이트 사람으로 일관해오고 있다.
이 신문이 누리는 높은 위신을 나타내는 단적인 사례는 세계적 명성의 헬무트 슈미트 전 독일 총리가 사임 후 국내외의 모든 초청을 뿌리치고 디 차이트의 발행인에 합류했다는 사실이다. 이로써 이 신문은 된호프 백작부인, 조머 박사, 슈미트 전 총리 등 세 분의 공동 발행인 밑에서 새로운 황금기를 맞게 된다.
유신체제 다각적 시각으로 보도
조머 박사를 한국에서 처음 만난 것은 1960년대 말. 그때 그는 창립 직후의 한국미래학회 초청으로 강연을 했다. 서기 2000년을 눈앞에 두고 ‘개발의 연대’라 일컫던 1960년대는 세계적으로 미래학이 붐을 이루고 있었다. 그런데도 유독 독일은 30년 후의 미래보다도 30년 전의 과거, 이른바 ‘제3제국의 과거 청산’에 매몰돼 있는 듯이 보였다.
이처럼 과거지향적인 독일의 언론 풍토에서 1970년대 중반에 디 차이트가 세계의 석학을 초빙해서 미래를 예측한 팀 프로젝트 ‘1980년대’는 압권이었다. 물론 그렇대서 그것은 독일의 과거를 덮어두고 미래를 도피하자는 것은 아니다. 1980년대에 세계적인 반향을 불러일으킨 독일의 ‘역사학자 논쟁’은 디 차이트의 오랜 필자인 하버마스 교수가 이 신문에 기고한 한 논문이 발단이 되어 1년을 끌었다.
이른바 ‘개발독재’ 체제하의 한국에 대해서 좀 무리한 단순화를 시도한다면, 미국의 언론이 주로 한국 경제의 ‘개발’ 성과에 대해 긍정적인 보도를 하고 있었다면 독일의 언론은 한국 정치의 ‘독재’ 체제에 대해 부정적인 보도를 했던 것으로 보였다. 다만 당시에도 디 차이트는 유신체제하 한국에서의 인권 상황에 대해 매우 비판적인 보도를 하는 한편으로 한국의 성공적인 산업화를 ‘제2차 세계대전 후의 제3의 경제 기적’이란 높은 평가도 하고 있었다.
그것은 세계를 편향된 일방적인 시각에서 보지 않고 되도록 다각적인 시각에서 현실의 다층적인 전체상을 보고 보도하려는 조머 박사의 디 차이트가 시범해준 저널리즘의 한 모럴, 한 전통처럼 느껴진다. 이러한 외국의 한 민간 언론인을 발굴해서 정부의 수교훈장을 수여하도록 추천한 것을 보면 우리나라 외교관과 외교통상부가 세계를 보는 눈이 꽤 밝다는 것을 시위해주는 듯 마음이 적이 흐뭇해진다.
최정호 울산대 석좌교수·본보 객원大記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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