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횡설수설/홍찬식]신분 상승

  • 입력 2008년 11월 8일 03시 01분


‘기회의 나라’ 미국에서 흑인 대통령이 탄생하자 ‘평등의 나라’ 프랑스에서도 흑인 대통령이 나올 수 있을지 세계인의 관심이 모아지고 있다. 프랑스는 19세기부터 외부 이민을 적극 받아들여 미국 못지않은 다인종 사회다. 그러나 평등에 대한 접근방식에서 두 나라 간에는 차이가 있다. 프랑스는 인구 통계를 낼 때 백인인지 흑인인지 구분하지 않는다. 차별을 우려해서다. 미국은 흑인 비율이 12.9%라는 정확한 수치가 나와 있을 만큼 현실을 먼저 드러내놓고 차별을 줄이는 노력을 한다.

▷월스트리트저널에 따르면 프랑스에서 흑인의 정계 진출은 미미하기 짝이 없다. 프랑스 하원의원 577명 가운데 흑인은 단 1명이며 3만6000명의 민선단체장 가운데도 3명뿐이라고 한다. ‘프랑스의 오바마’는 아직 멀었다는 결론이다. 프랑스는 TV뉴스에서 흑인 앵커를 거의 찾아볼 수 없는 나라다. 상류사회에 진입하려면 재력 이외에 가문, 학벌까지 고루 갖춰야 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이민자들이 도저히 넘을 수 없는 유리천장이다.

▷국내에도 잘 알려진 프랑스의 석학 피에르 부르디외(1930∼2002)는 프랑스에서 신분 상승이 어려운 배경을 연구했다. 그는 ‘문화적 자본’에 주목했다. 부모한테서 경제적 자본을 상속받는 것 말고 지식과 예술적 감각을 교육받는 것을 통해 기득권이 세습된다는 사실을 입증했다. 프랑스의 교육시스템도 양면성을 지닌다. 대학은 평준화되어 있으나 지도층 인사들은 거의 ‘그랑제콜’이라는 별도의 엘리트학교 출신이다. 대학을 나와선 출세가 힘들고 그랑제콜을 졸업해야 한다.

▷미국에서 흑인 대통령이 나온 것은 사회적 역동성 면에서 미국이 프랑스보다 낫다는 얘기다. 프랑스는 오랜 역사 속에서 계층이 고착화된 반면 미국은 짧은 역사로 신분 상승의 통로가 열려 있음을 보여준다. 한국은 6·25전쟁과 급속한 산업화를 겪으며 신분질서의 급격한 붕괴현상이 일어나 아직까진 계층이동 측면에서 형편이 훨씬 낫다. 그러나 최근 사회 양극화의 조짐 속에서 사정은 악화되고 있다. 프랑스를 이상적인 모델로 생각하는 국내 일부 이론가들은 입맛에 맞는 것만 골라 내세우지 말고, 전체를 보려고 해야 합리적인 해결방안이 나올 것이다.

홍찬식 논설위원 chansik@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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