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 음식은 역사의 큰 흐름 속에서 그다지 중요한 변혁을 이끄는 산물도 아니다. 심지어 시대가 바뀌었다고 사람들의 음식 행동이 당장에 바뀌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음식은 시대의 변화상을 가장 늦게 반영하는 ‘역사의 그릇’일 가능성은 충분히 있다. 음식의 변화상은 이른바 시대적 ‘유행(Fashion)’이라는 풍속의 그릇에 시대정신을 오롯이 담고 있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대장금’은 남자였다?
눈이 내리는 음력 10월. 산기슭에 화문석을 펼쳐놓은 남자 다섯과 여자 둘이 화로에 둘러앉았다. 화로에는 번철이 놓였고 그 위에 쇠고기로 보이는 고깃덩어리가 익고 있다. 한마디로 권세가들의 고기 파티 현장. 작자 미상인 ‘야연(野宴)’이라는 19세기 조선시대 그림 속 풍경이다.
당시는 제사상에도 쇠고기를 사용할 수 없어 산돼지와 산토끼를 잡던 때였다. 왕실은 수시로 소와 말에 대한 도살 금지령을 내렸다. 소는 이동과 경작에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동물이었기 때문. 그럼에도 양반들은 추운 야외에서 몰래 맛보는 육적(肉炙)의 맛을 포기할 수 없었다.
한국학중앙연구원에서 민속학 전공 교수로 재직 중인 저자는 조선시대의 풍속화 23점에 ‘고려도경’ ‘동국세시기’ ‘성호사설’ 등 음식사 문헌 사료를 가미해 당시 음식 풍경을 들여다보고 있다.
단오절 씨름판 풍경을 그린 16세기 조선 시대 화가 유숙의 ‘대쾌도’에서는 그림 구석에 서있는 술 장사꾼과 엿장수의 애환을 포착했고, 청나라 사신단 부대표였던 화가 아극돈이 그린 ‘청연’에서는 드라마 ‘대장금’에서 나타난 것과 달리 조선 왕실이 청나라 사신에게 매우 소박한 식사를 대접했다는 사실도 밝혀낸다.
저자는 특히 풍속화 속 낯선 조선의 모습에 주목한다. 이 중 하나가 조영석의 ‘채유’라는 그림이다. 갓을 쓴 내의원 의관이 임금에게 우유로 만든 타락죽을 대접하기 위해 궁중에서 생우유를 짜는 그림을 통해 조선시대에도 우유를 음식으로 즐겼음을 알려준다.
궁중 음식 장만은 남자들의 몫이었다. 1605년 그려진 ‘선묘조제재경수연도’(작자 미상)를 보면 궁중요리를 남자가 맡고 있는 걸 알 수 있다. 이 그림은 나이가 70세 이상 된 부모를 모시고 있는 재상 13명이 참여해 선조의 특명으로 잔치를 벌이는 모습을 그린 것이다. 이는 전근대 왕실의 벼슬 체계에서 비롯된 것으로 당시 사람들은 남자가 공식적인 일을, 여자가 비공식적인 일을 맡아야 한다고 믿었기 때문이었다.
저자는 감칠맛 나는 그림 속 음식을 소개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 김치가 등장하는 조선의 그림이 아직 발견되지 않았다는 사실에서 우리가 알고 있는 조선과 풍속화 속에 보이는 조선의 간극도 드러낸다.
한국의 간판 음식으로 불리는 김치도 100년 전 조선에서는 낯선 음식이었던 것이다. 19세기 말 조선을 찾은 외국인들에게 혀를 얼얼하게 만드는 김치의 맛은 특별했고 1920년부터 문헌을 통해 김치는 조선 음식으로 자리 잡는다. ‘한국인=김치’라는 등식은 오래된 게 아닌 셈이다.
무턱대고 믿어왔던, 혹은 그림 속 파편적 모습만을 보고 단정지었던 ‘한국적 전통’이라는 것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보게 된다. 이 책의 부제는 ‘조선의 표상과 실재에 대해 다시 생각하다’다.
염희진 기자 salthj@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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